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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8월 23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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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에 의해 영국패션계의 여왕, 펑크의 일인자, 살아 있는 국보로 불리는 그는 나이가 들수록 과감해지는 디자이너다.
대처 수상 시절 암울했던 영국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마거릿 대처로 분장해 상류잡지의 표지모델을 장식했다. 92년 51세에 켄싱턴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방문하러 가면서 속옷도 입지 않은 채 흰색의 속이 비치는 드레스만을 걸쳐 그녀의 나체가 신문지상을 도배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권위와 비도덕과 관습을 거부했고 그것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국은 전통과 엄격함이 존재하는 ‘여왕의 나라’다. 이런 곳에서 17세 이전에는 미술책이나 영화구경 한번 한 적 없었던 교사 출신의 웨스트우드가 펑크룩을 시도했다. 그리고 젊은이들과 패션 마니아들, 매스컴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영국의 패션 전통이 나름대로 창조와 파괴의 작업을 주도했음을 의미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궁중의상이 산업시대의 거리패션과 접목됐고 세계대전에서는 밀리터리룩의 시조인 트렌치 코트 문화를 만들어 냈다.
웨스트우드는 영국과 미국 뒷골목의 ‘저질’ 양식들을 가죽가면이나 변형된 십자가, 채찍 개목걸이 주술적 장식물로 만들었다. 귀족적 퇴폐미를 찢어진 청바지에 고전적 부츠신기, 엉덩이에 요란한 장식을 단 스커트로 재해석했고 이것은 시대적 스타일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웨스트우드는 대중적 인기 이외에 패션계에 끼친 영향에서도 두드러진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지방시의 수석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를 비롯해 많은 디자이너들의 정신적 지주인 웨스트우드는 파격적이고 무분별해 보이는 행위 뒤에서 지적 감성을 풍긴다. “공작은 매와 섞이지 않는다”고 말했듯 그는 대단한 자신감의 소유자다.
비비언 웨스트우드에는 ‘골드 라벨’과 ‘레드 라벨’로 구분되는 여성복과 25세 연하인 남편이 디자인하는 남성복이 있다. 패션 왕국을 건설중인 비비언 웨스트우드의 저력은 시대를 읽어내는 눈과 타인의 비판에 굴하지 않는 용기의 산물이다.
장현숙(보석 디자이너)
Client@jewelbutt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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