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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8월 17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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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피아노 곡 ‘달빛’을 들려주고 이 곡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달빛이라고 대답할까? 제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빼놓고서는 맞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묘사하거나 객관적 내용을 표현할 수 없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호학적으로 말하자면, 음악에서 음표, 박자 등과 같은 기호 혹은 기표(記標)는 특정한 내용, 즉 기의(記意)와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기의와 상관없이 그저 음악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평주의를 누르고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문학 비평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해체론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된 생각은 모든 텍스트가 기실 음악과 마찬가지로 기표들의 놀이에 의해서 생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텍스트를 분석하는 비평가의 임무는 텍스트의 숨겨진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의 개방성과 비결정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 책(원제 ‘해체론·Die Dekonstruktion’)은 해체론의 대표주자 격인 자크 데리다로부터 폴 드 만, 힐리스 밀러, 제프리 하트만, 해롤드 블룸 등 소위 예일학파로 통칭되는 미국 해체론의 흐름까지 그 사상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미 국내에서도 데리다로부터 미국 해체론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정리한 책들이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런데 유독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들자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먼저, 이 책은 해체론을 단순히 소개하거나 신비평이론 등과 같은 조류와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일 초기 낭만주의, 청년헤겔학파, 칸트, 헤겔, 니체 등의 철학적 전통 속에서 해체론의 발생사적 연관을 추적한다.
특히 언어의 불가해한 측면을 강조하는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사상이나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에 대항하는 청년헤겔학파인 슈티르너의 철학에서 해체론의 단서를 찾아내는 지마의 독창적인 지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해체론에 대한 단순한 소개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판서이기도 하다. 지마는 이미 다른 책들에서 문학적 담론이 비록 사회적 현실과는 다른 자율적 영역이지만, 간접적 방식으로나마 사회적 현실과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텍스트 사회학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해체론이 사회적 경제적 과정을 다룰 경우 이미 고정된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럴 경우 해체론은 그야말로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말놀이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 그는 해체론이 갖는 긍정성은 인정돼야 하지만 그 역할은 텍스트를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한 내부적 교정 수단에 제한돼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박영욱(고려대 강사·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