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읽는 책]임지현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 입력 2001년 8월 10일 18시 30분


“그 동안 우리 집 주차장을 쓰레기장으로 애용해주신 주신 주민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더 이상의 쓰레기장 개방을 중단하오니 이 점 널리 양해바랍니다.”

달포 전 학교에 갈 때의 일이었다. 서울 왕십리 전철역 앞 단층 벽돌집 담에 걸린 낡은 푯말로 나는 그 날 내내 기분이 유쾌했고, 그 아침은 아직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벽돌집 주인의 유머 감각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보아온 푯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접근금지’나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가위 그림과 함께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소변금지’ 따위였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담벼락이나 호젓한 골목길의 판자 담 위에 쓰여진 이 금지의 푯말들은 처음에는 작은 공포였고 나중에는 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조롱거리가 됐다.

◆ 화낼때도 좀 더 여유있게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접근을 자제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급한 볼일을 자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왕십리 사람들은 아마도 더 이상 그 벽돌집에 쓰레기 성원을 보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웃으면서 화내는 그 주인에 대해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은 바로 그 벽돌집 주인의 유머 감각과 닿아있다. 이 세계적인 기호학자를 화나게 만드는 것들은 그의 일상 지천에 널려 있다.

마음에 안 드는 머리 모양을 한 아들의 친구 녀석들, 음식물 흘리기를 강요하는 비행기 기내식, 거스름 돈을 준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만국의 택시 운전사들, 인디언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백인 기병대에게 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서부 영화, 그리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신문이나 주간지의 서평란 등등….

◆ '지식인싸움'을 논쟁으로 착각

이 세상의 그 모든 어리석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낸다면 어리석음의 목록을 더 풍부하게 해 줄 뿐이다. 에코의 말대로 ‘어리석음에 대해 어리석지 않게 반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웃으면서 화를 내는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해 웃으면서 화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여유가 있다.

그것은 현명함이 어리석음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방식만은 아니다. 인간사의 어디에나 끼어 있는 어리석음에 대해 현명함이 베푸는 예의이기도 하다. 예의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차별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멱살잡이나 이전투구의 핏대 싸움을 논쟁이라 착각하는 이 땅의 나 같은 지식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서양사)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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