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울 아버지 생각'

  • 입력 2001년 5월 21일 18시 31분


‘울 아버지 생각하면 떠오른다/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광주항쟁 때였다./ 광주의 젊은것들은 모두/ 공수대원의 각목과 총칼에 난자 당해/ 금남로 충장로가 피바다, 피곤죽 됐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울 아버지, 매일 밤 뜬눈으로 잠 못 이루시다가/ 오일팔 그 핏빛 십 일 간의 봄날이/ 탱크와 엠육십 기관총을 앞세운 계엄군 진압작전으로/ 이십칠일 새벽 네시를 기해/ 싹쓸이 당했다는 소식 접하고서/ 그날 새벽길 따라 내 고향 함평서 광주까지/ 창창한 일백 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밥 한 끼 안 잡수시고/ 이대독자 아들놈 찾아 한달음에 달려오신 아버지… 그날 오후, 햇살 한번 오지게 울창하던 날/ 쥐죽은 듯 골방에 숨어지내는 나를/ 골목길 물어물어 찾아내셔서/ 한참 동안 날 이윽히 쳐다보시더니/ 너 죽지 않고 살아 멀쩡하니 조상님들 뵐 면목 서서 다행이다…’(이승철 시인의 ‘울 아버지 생각’ 중에서)

그렇게 무심코 한마디 던지시고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정작 자식은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기 그지없었지요. 하여 자식은 한 세월 ‘죄스런 육신’을 이끌고 세상을 방황하고, 그런 그에게 시(詩)란 ‘상처입은 영혼의 아우성’이었는지 모릅니다.

▼광주 영령에 부끄러워 해야▼

스물두 살 청년이 마흔셋 장년의 시인이 되었듯이 어느덧 스물한 해, 세월은 빠르게 흘러 ‘5월 광주’는 이제 ‘역사에서 정신으로’를 얘기합니다. ‘광주시민의 5월’에서 ‘전국민의 5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 ‘5월 광주’가 아직 정신이나 전국민의 5월로 승화되지 못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면 ‘5월 광주’를 욕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5월 광주’를 욕되게 하는 것은 형식적인 제의(祭儀)요, 말로만 하는 정신이겠지요. 일년에 한번 기념식 치르며 ‘5월 정신’을 화석화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제의도 필요하고 기념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역사가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5월 광주’를 스스럼없이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된 편견과 왜곡, 오해가 만들어낸 상흔은 말끔히 지워져야 합니다. 그런 찌꺼기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훌훌 털어내야 합니다. 여전히 한풀이식 피해의식이나 막연한 가해의식으로 적대하거나 회피한다면 ‘5월 광주’는 정신이 될 수 없습니다.

끌어안음이란 것도 거창한 건 아니지요. 광주의 고통과 아픔을 내 고장 내 가족 나의 고통과 아픔으로 함께 하는 진정한 마음입니다. 자식이 죽었나 살았나 ‘창창한 일백 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던 아버지’의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들이 모여 용서와 화해를 이룰 때 ‘5월 광주’는 정신으로 승화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민주화는 ‘5월 광주’를 정신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화해를 일궈내지 못했습니다. 민주화의 두 지도자는 분열하고 반목함으로써 망국적 지역감정을 심화시켰습니다.

반세기만에 여야(與野)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경상도 정권’에서 ‘전라도 정권’으로 바뀌었다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국민통합은 구호에 그쳤고 정권은 국민의 신망을 잃었습니다. 실로 광주 영령들에게 부끄러운 일이지요.

▼거역할 수 없는 시대 흐름▼

이제 이 한계를 극복해내야 합니다. 더 이상 권력이나 정치에만 맡길 일은 아닙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어느 세월에 어떻게, 한탄만 할 일이 아닙니다. 당장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희망의 싹은 사회 곳곳에서 돋아나고 있습니다. 전환기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지역주의와 1인 보스 정치의 ‘3김 시대’는 종착역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내년 선거에서 누가 대권을 잡든 ‘3김식 정치’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카리스마의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했으니까요.

더디기는 하겠지만 지역감정의 맹목(盲目)도 차츰 눈을 뜨겠지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 ‘5월 광주’는 진정한 정신으로 거듭나겠지요. 그런 날을 고대하는 마음들이 하나둘씩 모아져간다면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겠지요. 희망을 노래해 봅니다. 아름다운 5월에.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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