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쟁점토론]'소극적 안락사' 허용

  • 입력 2001년 4월 27일 18시 32분


《대한의사협회가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내용의 윤리지침을 제정키로 함에 따라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측은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는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죽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대하는 측은 인간에게는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없으며 죽음의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야말로 존엄한 죽음에 반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찬성/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보장을▼

치료의 중단이 죽음을 촉진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사망은 타살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을 불법적으로 살해하는 것과 스스로의 결정으로 생명유지 장치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것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세계적으로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카렌 퀼란 사건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결 내용이다. 인공호흡기를 단 채 무의식 상태에서 죽어가는 딸의 모습에 충격받은 부모가 치료 중단을 요구하자, 살인이라는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 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허락하였다.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수명 100세를 현실로 만들었지만, 무익한 연명치료도 가능케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삶의 질이 유지되는 생명연장치료(Prolongation of life)와 불가역적 상태에서의 죽어가는 과정의 연장(Prolongation of dying process)은 구별돼야 한다. 전자에 대한 치료중단은 적극적 안락사로 살인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치료를 중단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인공연명장치를 이용해서라도 마지막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생존하라 고 강요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는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익한 치료를 중단해 자연스럽게 죽도록 해야 한다.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된 암말기 환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거나 투여되는 수액을 배설하지 못해 몸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경우 등에는 치료 중단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환자의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야 한다. 환자의 치료중단 요구권은 의사의 치료 의무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과정에 접어들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어떤 절차에 의하여 이런 평가를 할 것인지와 환자의 자율적 의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남용할 경우 죽음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임상경과나 진단결과를 토대로 신경과 전문의 2명 이상에 의한 평가와 병원윤리위원회에 의한 합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치료중단 의사 표시는 환자가 명시적으로 해야 하지만, 평소 소신 등 추정적인 의사가 확인되는 경우에는 가족들이 대신 행사할 수 있다. 급성심근경색이 발생하더라도 응급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달라고 사전에 요구한 경우에도 환자의 뜻이 존중돼야 한다.

다만 치료중단의 허용이 적극적 안락사까지 허용하자는 논의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서유럽과 같이 사회안전망이 확보돼 있지 않고, 장기환자에 대한 치료부담을 가족들이 책임지는 우리 현실에서는 자칫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치료중단 압력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살인'이고, 사회붕괴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신현호(변호사)

▼반대/마지막 순간까지 생명 지켜야▼

고양이를 죽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목을 졸라 죽이거나 아니면 굶겨 죽이는 방법이 있다. 어느 방법이 더 끔찍할까?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으면 죄의식은 좀 덜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굶어 죽는 고양이가 더 고통스러울 지 모른다. 죽이는 것과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런 면에서 같다. 안락사도 직접적 안락사와 간접적 안락사로 나누기도 하고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누기도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생명권과 아울러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인도 캘커타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테레사 수녀가 세운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길거리에서 병들어 쓰레기 더미 옆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행려 환자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돌보며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 곳이다.

자칫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것은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시점을 앞당기려고 하는 것은 존엄한 죽음에 오히려 반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존엄한 죽음이며 오늘날 호스피스운동으로 널리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막상 내과의사로서 중환자를 치료하다가 보면 예기치 않는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말기암 환자가 숨을 쉬지 않는 경우 과연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몇 년째 식물인간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는 혼수상태 환자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계속해야 할 것인지도 결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의사협회가 이런 부분에 관해서 회복이 어려운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구해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간과해서는 안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회복 불가능하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사실 회복 불가능한 상태는 뇌사상태, 말기암 환자 등 극소수의 경우에 한정되는 상황이다. 둘째는 의식이 있었던 때에 명시한 본인의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 생명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보호자가 치료중단을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의사 한 개인의 판단에 의존해서는 곤란하며 병원 생명윤리위원회에서 객관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아울러 무익한 치료를 중단한다고 할지라도 수액과 영양공급, 산소공급 등은 끝까지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진 말기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후 인공호흡기를 부착해 하루라도 수명을 더 연장하는 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연장이며 의료집착행위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무익한 치료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회복이 어렵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쉽게 치료를 중단하려는 행위는 안락사에 다름 아니며 이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보다 구체적이고도 신중한 지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박상은(기독교생명윤리단체협의회 총무·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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