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시게노부 후사코

  • 입력 2001년 4월 23일 18시 34분


“부르주아지 제군. 우리들은 너희들을 전 세계적인 혁명전쟁의 한가운데로 몰아넣고 일소하기 위해 여기 공식적으로 선전을 포고하는 바이다. 우리들의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누구라도 용서 없이 말살할 것이다.” 일본의 적군파는 1969년 세계를 상대로 이 같은 ‘선전포고’를 내걸고 결성됐다. 이 조직의 중앙위원 겸 중앙조직국 부국장이었던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가 세계혁명의 환상을 갖고 일본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71년, 나이 26세 때다.

▷일본 극좌학생운동의 일파인 적군파는 1970년 일본 민항기 요도호를 납치해 악명을 떨친 후 다음해 중동에 또 하나의 거점을 마련한다. 검은머리의 ‘여전사’ 시게노부는 그 책임자가 된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등과 연합해 만든 시게노부의 이 조직이 바로 ‘일본적군’이다. 26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한 1972년의 텔아비브공항습격사건, 1973년 암스테르담공항에서 도쿄(東京)로 가던 일본항공(JAL)납치사건 등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국제테러의 주범이 이 ‘일본적군’이다. 그러나 시게노부는 테러현장에는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신비의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을 드나들던 시게노부가 오사카에서 체포된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남장차림이었던 시게노부는 일본 적군파지원자들의 집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렸다. ‘일본적군의 여제(女帝)’로 불리던 그도 이미 50대 중반. 혁명이라는 환상과 광기에 휘말렸던 젊은 시절이 덧없이 느껴질 나이가 됐다.

▷그 시게노부가 검거된 지 몇 개월 만에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결심했다’는 옥중수기를 내 화제다. 팔레스타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27)에게 일본국적을 얻어주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탄원서를 모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세계를 무대로 악명을 떨치던 그가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사죄한다”며 울먹였다고 하니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모성은 혁명보다 강한가 보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