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정치 9단’의 악수

  • 입력 2001년 1월 8일 18시 25분


바둑천재 이창호(李昌鎬) 9단이 얼핏 기리에 벗어난 듯한 수(手)를 두어도 누구도 선뜻 악수(惡手)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 천하의 이창호가 둔 수니까. 하수(下手)의 눈에는 악수로 보인 수가 종종 묘수가 되어 난국을 타개하는 데야 감히 완착이네 실착이네, 입방정을 떨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네 ‘정치 9단’의 수는 어떤가. 이른바 ‘의원 꿔주기’에 대해 대다수의 관전자들이 대악수(大惡手)라고 해도 정작 ‘정치 9단’은 꿈적도 않고 그 문하생들은 ‘차선(次善)의 묘수’를 합창하며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쳐댄다. 이게 정말 바둑판의 일이라면 대마(大馬)가 죽든 말든 제3자는 흥미롭게 지켜보면 그만이다. 하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 9단의 악수’는 그럴 계제가 못된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관전자인 국민이니까.

▼국민감동과는 거리 먼 카드▼

나는 지난해 12월19일자 본란에서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에게 장고(長考) 끝에 악수를 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고언(苦言)했다. 나는 또 여러 차례 오늘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DJ가 민주당 당적을 내놓거나, 적어도 민주당총재직에서 물러나 국정에 전념하는 큰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지역당 구도에서, 더구나 옳든 그르든 영남권의 반(反)DJ 정서가 극에 달해 있는 현실에서 그것이 국민감동과 지역통합을 이끌어낼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DJ가 장고 끝에 내놓은 수는 DJP 공조(共助). 국민감동과는 거리가 먼 낡은 카드다. 품이 많이 들더라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과 상생(相生)정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림은 안 좋아도 ‘김종필(金鍾泌·JP) 자민련’에게 민주당의원 3명을 내주고 공조를 복원시킬 것인가. 결국 DJ는 편한 길을 택했다. 비서실장 출신인 김중권(金重權)씨가 당대표에 임명돼 ‘강한 여당론’을 주창한 것은 그 시그널이었을 뿐이다. 물론 ‘공동정권의 정신’에 따른다는 DJP 공조에 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합법성만으로 정치도의적 정당성까지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DJP 공조의 본질은 내각제를 통한 권력분점이다. 그러나 내각제는 실종된 지 오래고 자민련은 지난해 총선에서 야당을 선언했다. 엄밀히 말하면 DJP 공조는 이미 원천무효가 된 셈이다. 그런데 JP의 말처럼 “그때(4·13 총선)는 화가 나서 그랬다”가 이제 서로의 이해에 따라 다시 합친다니 국민이 거기에 어떤 도덕적 정서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DJP 공조란 두말 할 것도 없이 DJ, JP 두 ‘정치 9단’간 빅딜의 산물이다. DJ가 자민련 국회교섭단체란 정파의 생존권을 주는 대가로 JP는 DJ에게 국회에서의 수적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자민련 강창희(姜昌熙)부총재의 완강한 반발로 모양새는 구겼지만 DJP는 어제 저녁 청와대에서 만찬을 갖고 다시 공조의 깃발을 올렸다. 그러나 두 정파간 정략적 공조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두 정파간 공조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민주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고 하는 데 반해 자민련은 한 자도 못고친다고 한다.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문제에 대한 자민련의 입장도 당연히 부정적이다.

도대체 이렇게 뿌리도 다르고 이념적 정체성도 상반된 두 정파간에 무슨 생산적인 정책공조가 이뤄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차기 대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본격화되면 JP가 또 어떤 몽니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폭설보다 높게 쌓인 정치불신▼

모처럼 선거 없는 올 한 해에는 상생의 정치로 경제를 살리고 남북문제와 얽힌 남남(南南)갈등을 추슬러나가야 한다. 하지만 ‘정치 9단’이 반상이 부서지라는 듯이 두들겨댄 한 수는 당장 정치를 여야(與野) 극한대결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말로야 나라와 국민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어떡하든 상대를 거꾸러뜨려 권력을 이어나가려는 막무가내식 힘의 정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된다. 민심은 불안하고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폭설보다 높게 쌓였다. 이를 보지 못한다면 ‘정치 9단’이 아니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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