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제1의 성/활짝 열린 '여성의 세기'

  • 입력 2000년 12월 29일 19시 17분


나는 금년초 EBS 세상보기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세기가 밝았다’를 주제로 여섯 번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의 삶에서 그 주체가 필연적으로 암컷일 수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 인간사회만큼은 철저하게 남성의 세계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물학자의 눈으로 되짚어 보았다.

우리 독자들에게도 이미 몇 년 전 ‘사랑의 해부’라는 책으로 친숙해진 미국의 여류 인류학자 헬렌 피셔의 근저 ‘제1의 성’이 얼마 전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명저 ‘제2의 성’이 출간된 지 꼭 50년만의 일이며, 성에 관한 진화생물학적 분석에 불을 지핀 로널드 피셔의 저서 ‘자연선택의 유전학적 이론’이 나온 지 70년만의 일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는 보부아르의 절규는 이제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화려하게 ‘제1의 성’으로 거듭났다.

여성의 세기를 맞는 흥분 때문인지 피셔는 이 책에서 이따금씩 약간의 무리수를 두고 있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감성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의 특성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하는 미래의 경제환경에 훨씬 더 훌륭하게 적응할 것이라는 예측을 비롯해, 그가 내세운 몇몇 예측들에 대한 과학적 뒷받침은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나무라고 싶지 않다. 시계의 추가 가운데 머물기 위해 한 동안 반대편으로 옮아갈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세기가 펼쳐지는 것은 당위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필연성을 안고 있다. 시기가 언제인가만이 문제일 뿐이다.

여성의 세기를 여는 원년으로 삼았던 금년 한 해 우리 여성계는 참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많이 거뒀다고 생각한다. 오랜 숙원이었던 여성부 신설이 국회의 인준을 기다리고 있고 호주제 폐지도 눈앞에 다가왔다. 성폭력과 성희롱에 관한 규범이 여러 조직사회의 한복판에 우뚝 서고 있다. 비록 많은 사업들이 아직 결실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첫 걸음 치곤 손색이 없다고 자축해도 좋을 듯 싶다.

스스로 흡족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면 또다시 내년을 원년으로 삼자. 사실 2001년이야말로 진정한 21세기와 제3밀레니엄의 첫해가 아닌가. 금년에는 그저 많은 씨들을 뿌렸다 생각하고 내년부터 꽃도 보고 열매도 거둬들이면 될 것이다. 새해엔 우리 모두 갈매기가 되어 함께 하늘을 날게 되길 바란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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