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못된 여자나 영화에 출연한다

  • 입력 2000년 12월 11일 20시 02분


1963년 8월3일자 경향신문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기사 한편이 대서특필되고 있습니다. 신문 한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초대형 기삽니다.

큰제목, 작은제목들도 얼마나 선정적인지 모르겠어요.

`못된 여자나 영화에 출연한다' `말의 파문' `우리는 과연 못되고 무식하나?' `미인의 입에 <상한 심정>은 말한다' `미스 코리어도 마찬가지' `그런 미인도 과연 미인인지' `정말이면 나라망신시킨 말' `통역의 착오이길 믿고싶어' `한국적 부덕(婦德)의 잘못된 표현' `부디 착오이기를' `<못된 여자나 미스코리어로 나간다>는 말도 성립돼 ' `자기 순결성 강조한다는게 그만' `일부 여우(女優)들에 따끔한 일침' `그런 소리 듣지 않게 각성을' `하다보니 그런 말 나올 수도' 등등.

제목 베끼는데도 고단하군요. 도대체 이 기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사를 읽어보니 그해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숙명여대 3학년 김명자양(당시 20세)이 세계대회에 출전했는데, 외국에서 `무식하고 못된 여자나 영화에 출연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나 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영화계, 연예계는 발칵 뒤집어진 모양이구요.

신문은 이 가십성 기사를 어머어마한 특종으로 생각했는지 각계인사들의 장황한 코멘트까지 받고 있습니다.

후일 우리 영화계의 거목이 되실 두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전근대적이고 또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어떻게 현대의 현모양처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들딸이나 낳고 들어앉아 있으며 자기의 미모나 교양을 남에게 과시할 염도 안내는 것이 양처라고 생각하는 그가 어쩌자고 미인 콘테스트에 나가서 자기의 자태를 자랑했는지 모른다....

다른 한편 미스 코리어에나 당선되면 은행원이나 되는 것이 제격인줄 알지만 도대체 행원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자랑할 것인지 모른다. (이런 소리 하면 욕먹을지 모르지만) 행원이란 것은 주판이나 놓고 서류정리같은 것이나 하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작업을 하는 것이고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역할을 하는 일인데 그것을 이해못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아뭏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미인이 과연 미인인지 섭섭하기 짝이 없다. > (영화감독 유현목)

<......따지고 보면 착실한 규수감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인 이상 김명자양의 말이 그다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못된 여자나 영화에 출연한다'는 말이 일면의 진리를 지니고 있다면 `못된 여자가 미스 코리어로 나간다'는 말도 성립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연출가 김정옥)

`교양 있으신 분'이 하신 말씀이니 옳은 말 아니겠느냐고 재담식으로 눙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교양이 있으신 분인데 그런 분이 그런 말을 명확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면 자연 우리들 한국의 영화 출연자들은 무식한 것이 분명한 이야기가 되니까요. 혹 그런지도 모르지요. 우리들 연예인은 다 무식하고 몹쓸 것들인지도 모르지요.....> (코메디언 곽규석)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들을 욕하려고 한말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순결성을 말한다는 것이 그리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분이 참말로 교양이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그런 국제무대에서 그리도 무식하고 무교양한 말을 안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배우 김향이)

여대생들은 김명자양을 지지합니다.

< 잘한 말이다. 우리나라 일부 여우들의 무질서한 생활태도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스캔들=여우라는 관념을 일반에게 심어준 죄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깨닫고 좀더 건전한 예술가적 도야가 있어야겠다. > (숙대생 황명숙)

< ......우선 나 자신도 좋은 의미로서의 배우가 되고싶은 생각은 많은데도 못하는 이유는 만약 배우가 되면 타락이나 하듯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그런 소리를 안듣기 위해서라도 영화배우들은 각성을 해야 할 것이다. > (이대생 김숙자)

재밌게 읽으셨습니까?

저는 이 컬럼을 연재하면서 종종 `옛날을 너무 오늘날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유식하게 말해 이른바 `아나크로니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보곤 한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오늘은 `미스 코리어 김명자양과 각계인사들'의 멘트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얼마전의 최진실-조성민 커플의 결혼식을 리뷰해보기로 하지요. 그 이벤트는 여러모로 `공주님과 왕자님의 결혼식'이었지요. 이런저런 억울한 의심을 받던 여우(女優)가 공주님으로 얼굴을 바꾸는데 수십년이 걸렸군요.

늘보 <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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