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부랑아, 히피, 자유주의자 키아누 리브스

  • 입력 2000년 11월 17일 11시 01분


11월18일 국내 개봉되는 <리플레이스먼트>는 오랫동안 필드를 뛰지 않았던 오합지졸들이 모여 단 몇 주일만에 풋볼 플레이오프 트로피를 거머쥐는 하드보일드 스포츠 영화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 해도 오랜 연습으로 다져진 메이저 팀들을 단번에 누른다는 설정은 좀 지나치다.

그런데 이 과장된 휴먼 드라마를 넋 놓고 지켜보게 만드는 건 순전히 키아누 리브스의 힘이다.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키아누 리브스의 미소는 악마에게 마음 한 자락을 내주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모든 걸 잊게 한다. "키아누 리브스 때문에라도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영화"라는 미국 영화평론가들의 호들갑도 괜한 헛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산들바람을 닮은 남자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 하와이어로 '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라는 뜻의 퍼스트 네임은 그의 삶을 규정했다. 방황하는 자유인. 산들바람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고 떠도는 그의 방랑벽은 그칠 줄 모른다. 그에겐 여전히 집이 없고 가족이 없고 구속이 없다. 없는 게 많은 대신 '있는 것'도 많다. 그에겐 여전히 꿈이 있고 방황이 있고 자유가 있다. 노튼 코만도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무한 질주를 즐기거나 승마, 서핑에 쉽게 정신을 빼앗기는 그는, 나이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지금은 이런 자유를 한가롭게 즐길 줄 아는 그도 한땐 마음 둘 곳 없는 이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처음부터 그건 어긋난 시작이었다. 1964년 9월9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키아누 리브스는 다양한 종족에게 수혈된 복잡 미묘한 피를 물려받았다. 지질학자였던 아버지 사무엘 노우린 리브스는 하와이안과 중국인의 피가 절반씩 섞여있었고, 의상디자이너였던 어머니 패트리샤는 순수 미국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약 1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이들 부부는 호주와 뉴욕, 캐나다를 떠돌았고, 아직 어렸던 키아누는 살 곳을 선택할 힘이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키아누의 방랑벽은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다.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후 이들 부부는 금세 갈라섰다. 키아누와 여동생 킴은 어머니에게 맡겨졌으며 아버지는 홀로 떠났다. 그때부터 엄마의 지독한 남성편력이 시작됐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건너와 영화 감독인 폴 아론과 결혼했으며, 1년 후 그와 이혼하고 록 프로모터인 로버트 밀러와 결혼했다. 엄마의 결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미용실 원장 잭 본드를 새로운 남편으로 갈아치웠다.

아버지가 자주 바뀌자 생활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새 아버지를 따라 매번 거처를 옮겨야 했고, 학교도 4차례나 옮겨다녔다. 당시 사람들은 다비드 상처럼 완벽한 키아누가 아니라 "과제물을 항상 집에 두고 오는, 뭔가 모자라 보이는 얼뜨기" 키아누를 기억할 뿐이다.

게다가 그 무렵 친아버지 사무엘은 코카인 소지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3세 이후로 그는 약물중독자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가슴속에 응어리를 안고 있던 소년의 얼굴은 항상 우울했다. 구석에서 항상 숨어 지냈고, 친구가 없었다. 17세 때 학업을 때려치운 그가 향한 곳은 연기 아카데미. 어린 시절 발명가나 카 레이서가 되고 싶었던 그는 싸구려 동네 극장에 드나들면서부터 서서히 연기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변화무쌍한 행보

코카콜라 CF로 처음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한동안 엑스트라를 전전하다 드디어 캐나다 TV 드라마 <울프 보이>에서 조연급 배역을 따냈다. 그후 존 셰퍼드 감독의 'Flying'에서 한물간 체조선수를 사랑하는 경박한 소년으로 출연한 키아누는 캐나다 영화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캐나다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그의 할리우드 데뷔작은 <영블러드>. 팀 헌터 감독의 <리버스 엣지>에 출연하며 청춘스타 대열에 진입한 그는 <엑설런트 어드벤처> 시리즈로 인기를 다졌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경박하고 야성적인 록 매니아 테드였는데, 사람들은 "영화 속 테드가 실제 그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한다.

천성적인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인기가 높아질수록 부대끼기 시작했다. 청춘스타로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이때 만났던 친구가 바로 리버 피닉스다. 그는 같은 고민으로 지쳐가고 있는 리버와 마음이 잘 통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이다호>에 출연하면서 더 깊어졌으나, 친구 리버는 곧 <아이다호>의 라스트신처럼 아스팔트에 몸을 눕힌 채 체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후 그의 출연작 목록은 한마디로 변화무쌍했다. <필링 미네소타> 같은 칙칙한 멜로드라마의 히어로, 결가부좌를 튼 <리틀 부타>의 서양식 부처, <드라큘라>의 뱀파이어 전설에 휘말린 낯 빛 하얀 변호사, <스피드> <체인 리액션> <매트릭스>의 액션영웅 등. 여태껏 그가 해보지 않은 연기는 거의 없다. 그는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과 인디 영화계를 오가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영화만 하며 사는 드문 배우다.

◇부랑아, 히피, 자유주의자

그는 돈과 명예를 쫓아 움직이는 여느 할리우드 스타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스피드>를 끝낸 후 키아누 리브스는 이 영화의 속편에 무려 1천1백 만 달러의 출연료를 제의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시나리오가 형편없고 '독스타(Dogstar)' 공연도 겹쳐있다"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단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거부할 수 있는 스타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비스타가 아니라 배우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와주길 바라진 않는다. 난 그냥 나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스타보다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고 싶어하는 게 분명하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인기나 돈에 연연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정처 없이 여기 저기를 떠돈다. 하지만 사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도 일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하다. <리플레이스먼트>를 찍기 위해 두 달간 혹독한 풋볼 훈련을 받았던 그는, 그때 냉장고 안에 마사지용 얼음주머니를 달고 살았다. 근육통에 시달릴 만큼 혹독한 훈련을 감내한 수고는 영화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물론 그건 고등학교 아이스 하키 팀 선수였던 경력이 빛을 발한 것이지만, 그는 어색하지 않은 몸놀림으로 풋볼 선수 셰인 팔코를 멋지게 연기했다.

<매트릭스>를 찍을 땐 이보다 더했다. 이 영화의 트레이닝 기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4개월, 호주 촬영장에서 2개월이었다. 아홉 명의 트레이너가 달라붙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훈련을 강행했는데, 키아누 리브스는 지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에서 단 한 신을 촬영하기 위해 전신의 털을 밀어버리는 무모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특수분장을 하지 그랬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식으로 응수했다. "특수 분장은 아무래도 진짜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전신의 체모를 깎음으로써 내 정체성이 바뀌는 걸 경험할 수 있어 좋았어요. 그거야말로 연기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죠. 실제로 머리를 빡빡 밀 땐 정말 신이 나더라구요."

<리틀 부다>를 찍을 땐 명상과 불교경전을 공부했고, <구름 속의 산책>을 찍을 땐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귀환한 사람의 사진을 구해보거나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해병대원과의 인터뷰를 자청했던 키아누 리브스.

<매트릭스> 때보다 약간 살이 오른 그는 37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탄력 있는 외모, 젊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그는 "노튼 코만도 오토바이로 시속 200km 무한질주를 즐길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자신이 베이시스트로 참여하는 '독스타' 멤버들과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최근까지 전 재산을 가방 안에 구겨 넣고 전세계를 방황했던 그는 최근 로스앤젤레스에 작은 집 한채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영구적인 거주지가 아니다. 작은 집이 한 채 생겼을 뿐 여전히 그는 방랑을 계속하고 있다. 영화를 찍을 땐 영화 촬영장에, 영화를 찍지 않을 땐 낡은 바에서 시큼한 맥주를 들이키는 일에 심취한다. "삶은 농담"이라고 쉽게 내뱉는 그는 늦은 저녁 바에 앉아 삶의 넋두리를 늘어놓기에 좋은 '친구 같은 남자'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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