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엄마의 와우! 유럽체험]우리의 소주, 그들의 와인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0시 48분


취리히를 떠날 때는 적막하던 기차. 수도인 베른을 통과하면서부터 급속도로 승객이 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로잔에 이르러서는 80년대 대성리 행 비둘기 열차를 방불케 합니다. 다들 브베 와인 축제에 가는 길인가 봐요.

사람들이 이렇게 브베로 몰려가는 이유는 딱 하나. 25년마다 한번, 그러니까 백년에 네번 밖에 볼 수 없는 스위스 최고의 포도주축제 Fete des Vignerons 때문이죠. 우리도, 25년 후면 환갑이니, 기운 있을 때 봐두자며 지난 해 만원기차를 탄 겁니다.

우연히 만난 할머니로부터 이 축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7월 중순. 보통 7월말에서 8월 중순에 걸쳐 펼쳐지는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부랴부랴 호텔 잡아 놓고, 축제의 하이라이트라는 공연티켓을 찾았지만, 이미 일년 전에 매진되었다는 허망한 이야기. 그래도 일단 떠나 봤습니다. 공연 말고도 볼게 많을 거야 위로하며...

그런데, 이게 웬 떡입니까? 전날 밤의 폭풍우로 사람들이 무더기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남아도는 티켓이 생긴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훈련된 흥정의 귀재, 나우 엄마. 20만원짜리 티켓을 단돈 2만원에 사는데 성공. 꿈에 그리던 아레나 극장에 들어설 수 있었던 거죠

포도주 경작자들의 노동과 일상을 그린 3시간짜리 뮤지컬 공연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뮤지션들의 합작. 음악도 음악이지만, 프랑스 디자이너의 화려한 감각을 그대로 쏟아낸 수천 벌의 의상이 아레나를 수놓을 때의 눈부심이란...

출연자 5천명, 구경꾼 5십만 명. 구름 한 점 없는 호반의 포도주 마을을 덮은, 형형색색의 고풍스러운 드레스의 물결을 상상해 보세요. 어린이들은 포도넝쿨의 녹색 정장을 입었어요. 여인들은 숙성한 와인을 의미하는 보라 빛, 푸른빛 드레스를 휘감았구요. 여고생들은 흰 속살을 드러낸 말괄량이 바커스 여신이 되어 거리를 활보합니다. 와인의 영혼을 지키는 붉은 옷의 수문장들과, 금박 화려한 귀족의상을 휘감은 브라스밴드, 그리고 온종일 넘실대는 붉은 와인의 출렁임!

브베 와인축제의 기원은 17세기. 해마다 와인 경작인 조합에서 와인농가를 방문, 그 해에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든 이에게 상을 주었답니다. 처음에는 표창장 하나로 시작했는데, 점점 하나의 이벤트가 된 거죠. 퍼레이드도 하고, 왕관 수여식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역사적인 축제로 모양을 갖추게 된 겁니다. 게다가 작년은 20세기 마지막 축제라는 점, 대대적인 개기일식까지 볼거리가 겹쳐 더 많은 인파가 몰렸지요.

브베 와인축제는 스위스 최고의 와인을 시음하는 즐거움 이외에도, 볼거리의 향연입니다. 와인 레이디 복장을 한 인포메이션 담당자들을 잘 활용하세요. (나우네가 만난 와인 레이디는 서울 성북동에서 2년을 살았다면서 한국사람 최고를 연발! 덕분에 쏠쏠한 정보를 많이 얻었거든요.)

처음 와인을 발견한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를 음악과 춤으로 엮은 공연도 있고, 17세기 와인품평회를 재현하기도 합니다. 포도주 경작자의 조상인 아르마이 마을 남성중창단의 중후한 메아리는 또 얼마나 일품인지 몰라요.

아이들 데리고 온 부모님들은 교육적인 볼거리도 많습니다. 산간지방의 대장간, 빵 굽는 과정, 그뤼에르 치즈 만드는 과정을 보고 나서, 시식도 가능하죠. 호반에는 재주꾼들이 각자 마임, 음악, 그림 솜씨를 뽐내고 있군요. 과음은 금물이라면서 술잔에 물을 부어주는 스위스식 북청물장수도 있어 웃음을 자아내지요. 한낮의 더위에 지치면, 아이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분수 속으로 풍덩!

저녁에는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따라가며 무료 공연을 감상하면 됩니다. 알펜호른, 종치기 사나이, 깃발 던지기 등의 스위스 문화공연도 흥미 만점입니다. 공연을 보며 앉아 있다 보면, 형형색색의 와인 레이디들이 몰려다니며 와인찬가를 부르기도 해요. 천상의 화음처럼 울려 퍼지는 포도주 예찬에 호수의 별빛 조차도 숨을 죽이는 듯 하지요.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꼬르테쥐(Cortege)라 부르는 퍼레이드 시간. 전 출연진이 멋진 팡파레 연주 속에 행진을 하고, 성공적인 축제를 기념하며 와인 축제는 이별을 고하는 거죠. 보고 싶으시다구요? 아쉽지만, 25년만 기다리세요.

일박 이일로도 짧았던 브베 와인축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기차 시간에 쫓겨 역으로 향할 때였어요. 길모퉁이 까페. 퍼레이드를 마친 수십 명의 출연자들이, 축제 의상을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와인 잔을 마주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에디뜨 삐아프의 샹송.

Oh, rien de rien, Oh je ne regrette rien...(음...아무것도, 아무것도, 음... 난 후회하지 않아). 마침 손을 마주잡고 곁을 지나가던 한 중년부부가 속삭입니다. "여보, 인생이란 거, 정말 멋지지 않아?"

그들에게 있어 취흥은 인생을 잊기 위함이 아니라, 더 깊이 인생으로 파고 들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와인은 영원하겠지요. 비오는 날, 한잔의 소주가 우리에게 영원하듯이.

나우엄마 (nowya200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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