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멋진 캐릭터만 만들면 만사형통

  • 입력 2000년 10월 17일 19시 59분


일본영화들을 보면 "참 재미난 소재도 많구나" 싶습니다. 어디서 그런 소재를 찾아내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얼마 전 일본 신문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남자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나와 있습니다. 남자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라…. 스포츠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지 않습니까.

제목은 <워터 보이즈>(가제), 감독은 야구치 시노부입니다. '돈에 환장한 여자'라는 독특한 소재를 영화화한, 우리 나라에선 <산전수전>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는 <비밀의 화원>의 바로 그 감독입니다. 제작은 수오 마사유키가 설립한 영화사 알타미라 픽처스. 수오 마사유키는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등 줄곧 기발한 소재의 영화만 만들어온 감독입니다. 제작자와 감독의 성향이 이러니, 이 영화의 소재도 기발할 수밖에요.

소재가 기발하다 해서 스토리 전개까지 기발한 건 아닙니다.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이번 영화만 하더라도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의 매력에 빠진 남자 고등학생들이 주위의 편견과 무관심을 딛고 일어서 결국 성공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지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란 소재만 특이할 뿐이지 내용은 다른 영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요즘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 문화는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만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소재는 다 독특합니다. 초밥 맛있게 만드는 데 일생을 바치는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바다 낚시에 청춘을 건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의사 이와말>처럼 수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라면 꿈도 꾸지 못할 소재의 만화가 등장하고 또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 구조가 아주 독특한 만화는 <침묵의 함대> <시마 과장> 등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판타지 소설도 형편은 다를 게 별로 없습니다. 이쪽 방면에서 이름을 떨치는 일본 작가 가운데 기쿠치 히데유키란 사람이 있습니다. <무사 쥬베이>의 가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던 <마계도시 신주쿠>도 이 사람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다작 작가로 유명합니다. 한 달에 책을 네 권(옛날 작품 리메이크까지 포함해서)이나 출간한 적도 있습니다. 작품을 쓸 때 이 사람이 가장 중점을 두는 작업이 뭔고 하니 바로 캐릭터를 만드는 일입니다. 캐릭터를 잡아내면 스토리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니 상대적으로 내용 만들기는 뒷전입니다. 그는 "색다르고 매력적인 캐릭터만 잡아내면 책 한 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모부에 들어가게 된 대학생'이나 '영업 직원 출신의 형사' 또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고 싶어하는 남자 고등학생'이란 캐릭터만 잡아내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으랏차차 스모부>건 <워터 보이즈>건 소재는 색다르지만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좀 다릅니다. 캐릭터보다는 좋은 스토리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이랬더니 마침 그때 악당이 저랬더라, 하는 식의 스토리를 캐릭터보다 먼저 정합니다. 요즘 들어 이런 분위기는 상당히 바뀌었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도시락 케이스에 먼저 신경 쓴다면 우린 도시락의 내용물에 더 신경을 쓴다고나 할까요. 제대로 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요.

다만 질보다 양이 더 우선시 되는 요즘 대중 문화 풍토에서 일본 쪽이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가져봅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따를 자가 없다는 할리우드에서도 제작자가 작품을 고를 때 '20자 이내로 줄인 줄거리를 들어보고' 제작 유무를 결정한다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캐릭터가 뛰어난 대중 상품은 '영화 뒤의 산업', 다시 말해 캐릭터 사업을 할 때도 유리합니다. 주인공 인형을 만들어 팔 수도 있으니까요. 캐릭터를 중요시하는 일본 대중 문화. 사업가라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볼 만합니다.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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