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詩로 놓은 200개 징검다리 '아름다운 슬픔'에 다시 젖는다

  • 입력 2000년 10월 6일 18시 30분


1975년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가 나온 지 25년. 창작과비평사의 ‘창비시선’이 200권을 돌파했다.

신경림을 비롯해 고은 조태일 최하림 김준태 정호승 이성부 김지하 곽재구 김남주 김용택을 지나 나희덕 박형준 김선우에 이르기까지, 창비시선은 ‘오늘의 시인총서’(민음사), ‘문지시인선’(문학과지성사)과 함께 20세기 후반 한국시를 활짝 꽃피웠다. 특히 ‘창비시선’은 시가 시대와역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의욕적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다.

‘창비시선’ 200권 돌파를 맞아 최근 기념시집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가 나왔다. 1975년 이후 지금까지의 대표적 시인 88인의 시 각 한 편씩을 골라 실었다. 황동규 김광규 마종기 최승자 오세영 황지우 이성복 기형도 조정권 유하 윤중호 김혜순 송찬호 등 ‘창비시선’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도량’도 평가할 만 하다.

여기 실린 시편들의 전체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굳이 말하라면 ‘아름다운 슬픔’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중)

그러나 그 아름다운 슬픔 뒤엔 증오와 분노가 있고 저항과 투쟁도 있다. 그리고 행간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면 내일에 대한 희망과 그 희망에 대한 처절한 사랑이 흐른다. 그건 치열함이다.

‘한밤에 일어나/얼음을 끈다/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정희성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 중)

한국시는 80년대말을 지나며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역사와 집단 못지않게 개인의 실존과 내면에 좀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 그 흔적이 역력하다.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돌아오지 않는다/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아침은 멀리 있고//나는 내가 그립다’ (이문재의 ‘마음의 오지’ 중)

이 시집엔 역사와 실존, 집단과 개인, 서사와 서정의 갈등과 긴장이 잘 담겨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 정신을 담기 위한 몸부림까지. 그건 시인의 고민과 시의 긴장을 유발한다. 그 긴장과 고민이 이 시집을 아릅답게 한다. 감동이 있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꽃을 활짝 피웠다/허공으로의 네 발/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송찬호의 ‘동백이 활짝’ 중)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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