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변호사가 본 법정영화/"영화와 법정은 잘 어울리죠"

  • 입력 2000년 9월 28일 19시 16분


“영화는 등장인물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중요한 줄거리로 하고 법정 역시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고도의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이라는 유사함이 있습니다.”

아마추어 영화평론가인 조광희(趙光熙)변호사는 이런 이유로 “영화와 법정은 서로 친화력이 있는 매체와 소재”라고 말한다.

▽실태〓그러나 한국의 법정영화는 양과 질 양면에서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90년작인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나 98년작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 간헐적인 작품이 있었을 뿐 미국에서처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조변호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법정과 한국법정의 차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법정에서는 배심원을 놓고 검사와 피고인 혹은 원고와 피고가 한발의 양보도 없는 투쟁을 벌이고 영화는 이 과정의 역동성을 쉽게 영상에 담을 수 있다는 것. 반면 ‘말없는’ 판사가 주로 양측이 제출하는 ‘서류’에 의해 재판하는 한국의 법정은 그 자체로 그리 재미있는 소재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97년 영화 사전검열제에 대해 위헌결정을 받아냈던 김기중(金基中)변호사는 영화가 참고할 ‘텍스트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는다.

한국의 법과 법조 현실을 잘 아는 법조인이 쓴 소설과 다큐멘터리 등 시나리오의 소재가 턱없이 부족한데 비해 영화인들의 법조에 대한 지식은 극히 빈약하다는 것.

그러다보니 몇 안되는 법정영화에서는 잘못된 법정용어는 물론 전혀 현실과 다른 법률적인 쟁점이 부각되고 잘못된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전망〓그렇다면 한국의 법정영화는 별반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일까. 98년 단편영화 ‘23번째의 해프닝’을 직접 감독했던 권성희(權星姬)변호사는 “우리 법정에서도 매일 수많은 갈등이 표출된다”며 “이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담아낼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변호사와 김변호사는 “한국 법정영화는 미국 법정영화의 형식을 탈피해 한국 법정의 현실에 천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투캅스’가 미국영화처럼 ‘경찰과 악당’이라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적당히 부패한’ 한국 경찰의 현실을 그려내 흥행에 성공한 것과 유사한 논리.

조변호사는 “법조계의 권위주의와 법률가 집단의 은밀하고 사적인 관계, 수사와 재판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의혹, 경시당하고 모멸당하는 소송 당사자의 권리 등 한국적 현실은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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