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현장21] 태풍과 싸워 이긴 노인

입력 2000-09-09 22:01수정 2009-09-22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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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8.3m의 강풍에 15m를 넘는 파도, 사상최악의 태풍 한가운데서 6시간 동안 파도와 싸워 이기고 배와 함께 무사히 귀환한 늙은 어부가 있다.

목포 남서쪽 150km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지난 태풍에 이곳의 배는 모두 부서지고 고흥산씨(63)의 작은 목선 해두호(3t)만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지난 8월 31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강력한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은 서해 남쪽 머나먼 외딴섬을 덮치고 있었다.

이날 새벽 바다에 그물을 치고 항구로 돌아온 고씨는 태풍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에 동료 어부들을 내려 보내고 다가 오는 태풍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미 26척은 육지에 올려진 상태이고, 8척은 방파제 뒤에 닻을 내리고 태풍에 대비하고 있었다.

태풍이 불 때면 목포항이나 흑산도항으로 피항을 해야 하지만 고씨 등 주민들은 태풍이 빗겨갈 것이라는 예보를 믿고 피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풍은 가거도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씨는 육지에 배를 올려 놓아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씨 가족에게는 이 배가 모든 것이다.배가 못쓰게 되면 생계를 이어갈 길이 없다.

"굶어 죽으나 바다에 빠져 죽으나… 차라리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자. 바다에 떠 있으면 배는 상하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배도 죽을 것이고 내가 살면 배도 살 것이다"

고씨는 바다로 나가 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8시.서서히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은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도 아니 바다가 통째 넘실대며 높이가 점점 높아졌다.바다는 10여미터 솟구쳐 방파제를 훌쩍 넘는다.방파제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8월 31일 오전 10시경. 산더미보다 더 큰 파도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다. 육지에 인양된 선박들도 파도에 휩쓸려 부서지면서 서로 뒤엉켜 있다.(당시 신안경찰서 가거파출소 오금택경사 촬영)

고씨는 방향타를 잡을 때마다 늘 끼던 한 짝뿐인 낡은 스키장갑을 벗었다. 방향타를 잡은 손이 미끄러져 파도가 배의 측면을 치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장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파도의 방향은 북서, 고씨는 방향타를 움직여 뱃머리를 정확히 파도 방향에 맞췄다.엔진출력을 최대로 올리면서 거대한 파도를 향해 돌진했다.

"파도가 칠 때 정면으로 배를 몰고 들어가지 않으면 날아가버려"

뱃사람 경력 40년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배가 견딜 수 있을까'

태풍이 몰아온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힐 때, 해두호의 뱃머리는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아올랐다.

고씨가 배 후미로 밀려 내려갈 정도로 뱃머리는 90도까지 상승했다.30초 동안 계속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30초 동안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다.

고씨는 오른손으로 방향타를 고쳐잡고, 왼손으로는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고 다시 엔진 출력을 높였다.파도에 순응해 파도를 따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20분.파도는 방파제 끝 쪽에 있던 40t급 신광호와 승일호를 침몰시켰다가 그것도 모자라는지 배 두척을 번쩍 들어 올려 육지로 내동댕이 쳤다.

 

태풍에 박살 난 신광호와 승일호가 해안에 방치돼 있다

"배 몬지 40년이 넘었는데 자신감이야 있었지. 하지만 파도가 높아지고 다른 배들이 침몰하는 걸 보니 겁도 나더구먼"

정오가 되자 태풍의 위력은 한층 더 거세졌다.고씨는 배가 파도와 부딪히면서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때, 뱃머리를 확인하면서 계속 남동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심한 물보라로 이미 계기판의 나침반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방파제 뒤에 있던 6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갑자기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방파제가 80m나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방파제가 무너지자 육지에 올려 놓은 배도 형편은 마찬가지 였다.배란 배는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

해안에 나와 고씨의 사투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선박용 마이크를 통해 "배를 버려요"라고 간절하게 외쳤다.그러나 이제는 배를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씨가 태풍과 싸우고 있는 동안 해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 들어 어느덧 전 주민이 해두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두호가 파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으면 "아", 그러다가 다시 물 위로 떠올라 아직도 방향타를 놓치지 않는 고씨가 보이면 모두들 "와"하고 환호를 질렀다.

고씨의 부인 임복진씨(63)도 해안에서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나 인양해 놓았던 배가 부숴 지면서 날아온 파편에 맞아 늑골이 6개나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10여명의 청년은 잠수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해두호가 파도에 휩쓸려 버리면 바다에 뛰어 들어 고씨를 구할 참이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청년들은 기꺼이 바다에 뛰어 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배가 보이지 않을 때 마다 바다에 뛰어 들려는 청년들을 노인들이 한사코 붙들고 늘어지는 비장한 광경이 되풀이 됐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태풍과 6시간의 사투를 벌인 고씨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서서히 약해지는 파도를 느꼈고, 그제서야 어깨와 허리가 제 몸이 아닌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가거도를 통째 짓이겨 놓은 태풍은 오후 6시쯤 고씨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서서히 북쪽으로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그제서야 고씨는 배를 항구 쪽으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주민들은 배에서 내리는 고씨를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어촌계장 정석규(43)씨는 "태풍에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다"고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볼일 볼 재간이 있어야제. 그냥 바지 입은 채로 해결했지뭐. 허허허"

악몽같은 6시간의 기억을 더듬는 고씨의 얼굴에는 오래전 추억을 이야기하듯 대수롭지않다는 웃음이 묻어난다.

"또 그물 건지러 가야제"

태풍을 이겨낸 해두호가 조업을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가고 있다

이제 가거도에 남은 단 한척의 고기잡이배, 해두호.

주민들은 고씨의 출항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만선을 기대한다.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온 그는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해두호를 타고 오늘도 바다를 향한다.섬 전체 주민의 유일한 희망이다.

고씨가 해두호를 살려 내지 않았더라면 가거도 주민들은 이번 추석 차례상에 그 흔한 생선 한마리 올려놓지 못 할 뻔했다.

<신안 가거도=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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