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李運永과 ‘동국대팀’

  • 입력 2000년 9월 7일 18시 58분


지난달 31일 저녁 7시45분경. 작년 4월 사표를 낸 뒤 지금껏 도피중 인 신용보증기금 전 영동지점장 이운영(李運永·52)씨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커피숍에 나타났다. 허름한 티셔츠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그의 도피생활을 돕고 있는 모교 선후배들로 이뤄진 ‘동국대팀’과 긴급연락을 받고 나온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는 황급히 들어와 두려운 표정으로 ‘양심선언문’을 10여분간 읽어내려 갔다. “앞으로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을 경우 혹시 탄원서와 다른 내용을 진술한다면 허위자백으로 알아 주기 바란다”는 요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뒤로 하고 그는 서둘러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동국대팀이 준비해 놓은 승용차를 버려둔 채 지나던 택시를 잡아 타고 사라졌다.

5일 오전 10시30분. 다시 동국대팀의 연락을 받은 기자들이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커피숍으로 갔다. 동국대팀은 이씨와 기자들을 승합차에 급히 태워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5분쯤 뒤 한 승용차가 따라붙었다. 20여분간 이 길 저 길을 빙빙 돈 뒤 교통신호를 이용해 겨우 승용차를 따돌렸다.

한숨을 돌리고 목표 장소로 향하던 중 또 다른 승용차와 승합차가 따랐다. 동국대팀은 수사기관 차로 직감하고 재빨리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차를 숨겼다.

이 곳에서 이씨는 “내 진술을 왜곡 없이 받아들여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검찰에 갈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추석 전에 나가려고 했으나 생각이 바뀌어 시점을 더 보고 있다”고 했다.

2시간 정도 회견 했을까. ‘걸린 것 같다’는 외부의 연락이 오자 이씨는 ‘4년 선배’의 승용차를 타고 황급히 사라졌다.

한편 서울지검 동부지청. 지난해 이씨의 ‘1400만원 뇌물수수 사건’ 수사를 대검에서 하명받은 검찰청이다. 이씨의 도피로 내사를 중단했던 동부지청은 이번에 이씨를 검거하기 위해 연일 고심하고 있다. 동부지청은 뇌물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끝낸 상태다. 검찰 입장에서 이씨는 ‘범죄 혐의자’이고 더욱이 뇌물액수가 많아 구속대상이다.

동부지청측은 이씨가 나오면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에 의한 ‘대출보증 압력’과 사직동팀의 ‘보복수사’ 주장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조사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런 대목들은 엄격히 말하면 별개의 사건이지만 ‘범행동기’ 부분을 조사하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씨가 이 말을 얼마나 믿을지는 미지수다. 이씨의 ‘홍길동(洪吉童)식’ 기자회견과 그를 ‘독립운동’하듯이 돕고 있는 동국대팀, 그리고 검찰의 대응 등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아직도 이런 수준인가 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도 2년 반이 넘어선 시점이다. 그런데 국민이 자신의 주장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실. 이는 그의 유죄 여부 이전의 문제다.

50대의 그를 대학 선후배, 그리고 재학생들까지 똘똘 뭉쳐 돕고 있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입버릇처럼 ‘공정한 수사’를 외치는 검찰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육정수<사회부장>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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