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삼윤의 문명과 디자인]알함브라 궁전 분수

  • 입력 2000년 8월 27일 18시 47분


청각적인 요소란 다름 아닌 분수. 그런데 그게 예사롭지가 않다. 구중궁궐에 해당되는 사자궁전 한가운데 열두 마리 돌사자가 입으로 연신 물을 뿜어대고 있는 ‘사자분수’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궁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헤네랄리페(여름궁전)’ 정원의 분수는 그와는 반대로 긴장을 풀어줄 뿐 아니라 얼마간의 한가로움마저 선사한다. 내가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본 것은 솟구치는 물방울이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리다가 못 위에 떨어지는 헤네랄리페 정원의 분수였다. 그 소리가 타레가의 기타 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선율 그대로여서 내 가슴도 그렇게 떨리고 울렸던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다양한 분수대

그라나다가 있는 남부 스페인은 매우 건조하다. 그런데도 무어인들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못과 분수를 만들었다. 그걸 위해 그라나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봉우리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이는 노고쯤은 아끼지 않았다. 고대 로마인들도 그랬다. 거대한 수도교(水道橋)를 통해 막대한 물을 끌어들여 11개의 대욕장과 856개의 공중욕장, 그리고 15개의 님펜(트레비 분수와 같은 천수당·泉水堂)과 1352개의 분수를 작동시켰으니까.

그러나 분수는 로마인들의 발명품은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가 원산이다. 페르시아의 ‘왕의 길’을 본 따 ‘비아(街路) 아피아’를 건설하여 ‘길의 문화’를 꽃 피운 로마인들은 그 페르시아로부터 분수 기술까지 배워 분수문화를 활짝 개화(開花)시켰다.

페르시아인들은 왜 분수란 것을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재 이란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땅은 메마른 사막이나 진배없는 땅이다. 물과 나무를 갈구할 수 밖에 없는 자연조건이었기에 번성은 고사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연 속에서의 메마름을 인공적으로, 때로는 예술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못을 만들어 분수를 세우고 꽃과 수목이 자라는 정원을 꾸민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였다. 가로수 또한 그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던가.

인도총독을 지낸 바 있는 영국의 동양학자 커슨 경은 “페르시아인들이 원한 것은 시원한 나무그늘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뿜어내는 아름다움, 그게 전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낙원을 뜻하는 영어의 ‘파라다이스’가 ‘둘러친 정원’이란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 ‘pairi daeza’에서 유래된 사실로도 증명된다.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꽃피워

이런 이유로 페르시아 미술은 식물문양을 즐겨 사용했을 뿐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인공적으로 존재케 하는 ‘장식성’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변화하는 율동적인 덩굴 선을 주된 모티프로 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러한 페르시아 미술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하게도 페르시아 시대의 정원과 못, 분수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15∼16세기에 페르시아 시대의 것을 본 따 지은 것은 중세 도시 이스파한에 있다. ‘체헬 소툰’이 그것이다. ‘40개의 기둥’이란 뜻의 체헬 소툰은 목조 궁전 한 채와 커다란 사각의 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 기둥이 20개 밖에 되지 않는 건물을 ‘40 기둥’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20개는 못의 수면에 어려 있다면서 못에 궁궐과 동등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들은 못가에다 세 여인을 빚어 만든 조각까지 세웠다. 아주 중요한 부분만 가린 옷은 얇디얇아 몸의 굴곡과 미세한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볼록한 젖가슴, 예쁘게 살짝 찍어 놓은 것 같은 젖꼭지, 가는 허리, 꼬불꼬불 틀어 올린 머리…. 전체적으로 탄력이 넘치는 몸매다. 그러니 누가 가만히 두었겠는가. 그녀의 두 뺨과 가슴, 엉덩이, 배꼽, 국부는 반질반질 닳아 있다. 그런데 그녀가 바쳐 들고 있는 물 항아리 끝에선 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세 여인 조각은 분수였던 것이다. 이슬람에선 알몸의 여인을 조각으로 빚을 수 없을 텐 데도 굳이 저렇게 만든 것은 페르시아 시대의 분위기를 살리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분수는 물의 자연적 흐름을 뒤바꾸는 장치로서 그 속엔 현실부정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것은 불모성에 대한 항거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긍정의 태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물 풍부한 동아시아에선 순리중시 '역류시설' 없어

현실의 세계가 불모의 땅이라는 이유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물을 끌어들이고 나무를 심어 자신의 낙원을 불모지 위에 건설하려 했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현실 긍정의 자세가 오히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물이 풍부하고 늘 생명체로 충만한 동아시아에선 물의 흐름 그대로인 계류를 삶의 공간 속으로 끌어들였지만 그것을 뒤바꾸는 분수 같은 것은 생각지 않았다. 순리를 그만큼 중시했기에 현실부정의 태도는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권삼윤(문명비평가)tumin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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