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대북 자신감의 문제다

  • 입력 2000년 8월 21일 18시 48분


남북 이산가족의 ‘눈물 상봉’에 묻혀지나간 듯도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주요한 의제가 있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폐지하거나 개정 또는 대체입법할 것인가의 문제다. 남북 정상의 6·15공동선언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면 아래에 잠복하고 있는 ‘남남(南南)갈등’의 폭발력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국가보안법 문제는 그 상징적 의제 중 하나다.

▼우리 필요와 판단에 따라 ▼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8월12일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의 대화에서 ‘국가보안법은 남조선 문제’라고 발언했다. “남조선 국가보안법은 남조선 법이고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발언의 의미 또한 그의 대부분의 발언이 그렇듯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동안 북측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국보법 폐지 요구를 철회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국보법을 폐지하든, 개정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남측도 우리의 노동당 규약에 대해 (언제라도 바꿀 수는 있지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명백한 것은 김위원장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북측의 국보법 폐지 요구는 남한사회의 국보법 유지론에 힘을 실어줬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 수년간 남한사회 내에 일고 있는 국보법 폐지 또는 개정 요구를 용공 또는 친북세력이 주도하고 있다고 볼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국보법 개폐 문제는 우리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국민적 합의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북이 바꾸라고 해서 바꾸고, 상관하지 않는다고 그대로 둘 게 아니다. 이는 우리 체제의 자존심과 자신감의 문제다.

국보법 철폐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면 이렇다. 첫째,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전략을 근본적으로 포기했다고 볼 수 없는 이상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국보법은 존속되어야 한다. 둘째,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를 엄단하는 북한 형법의 개폐 없이 국보법만을 철폐하는 것은 형평성이나 상호주의 측면에서 부당하다.

그러나 국보법, 그 중에서도 특히 찬양 고무죄(제7조) 등의 일부 조항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정권안보에 악용되면서 숱한 인권침해를 저질렀고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까지 지탄을 받아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앞세운 ‘반인권 반민주 악법’이란 오명이 따라다니는 한 지금 그대로의 국보법 유지 주장은 국제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더구나 최근 국보법 위반사건의 90% 이상이 7조 위반이고, 기소가 된다 해도 실제 형벌을 받는 비율은 고작 5∼6%에 불과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굳이 국제적 비난을 받는 지금의 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완전폐지가 어렵다면 시대에 맞지 않는 일부 문제 조항을 개정하거나 대체입법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명시한 조선 노동당 규약 전문(前文)과 북한 형법의 반인권적 반통일적 내용 및 조항들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이를 그대로 둔 채 북한이 화해와 통일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쪽이 안 바꾸니 우리도 못 바꾼다는 식의 상호주의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저들이 바꾸든 말든 우리는 우리 판단대로 바꿀 것은 바꾸고, 그런 뒤 저들의 악법 개정을 촉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체제 우위를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만한 자신감은 보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국민적 합의 서둘러야 ▼

김대중(金大中)정부는 그동안 국보법 문제에 대해 폐지에서 유지, 개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초 폐지론자였던 김대통령은 정권 초기 자민련과의 합의로 폐지는 어렵다고 했다. 이제는 다수 야당이 반대해 어렵지만 개정하겠다고 한다. 국보법 개폐 반대를 무조건 반통일세력으로 몰아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계산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그러다가는 남한사회 내 이념적 갈등과 분열의 골만 깊어질 것이다. 서둘러 국민적 합의를 구해야 한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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