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의사선생님들의 '투쟁'

  • 입력 2000년 8월 13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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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휴가기간에 읽은 소설 ‘가시고기’에는 ‘민과장’이라는 의사가 등장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정다움’이란 초등학교 3년생의 주치의다.

아빠는 아들의 입원비와 수술비를 댈 능력이 없는 이혼한 시인. 일찌감치 부자(父子) 곁을 떠나버린 화가 엄마는 이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부자간에 펼쳐지는 깊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가 줄거리다.

이 소설 속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한 민과장을 떠올리는 것은 그가 ‘특별한 의사’여서가 아니다. 그는 병원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편안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려는’ 의사 중 한 명일 뿐이다. 즉 ‘평균적 의사’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민과장이 한 의사로서 행한 일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다. 다움이에게 적합한 한 일본인의 골수를 어렵게 찾아내 이식수술에 성공해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을 되살렸다.

작가가 소설을 여기에서 끝낼 리 없다. 아빠는 수술비 마련을 위해 자신의 장기를 팔려다 ‘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은 한쪽 눈을 판다. 민과장은 간암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려고 모르핀 주사를 놔준다. 시인은 곧 최후를 맞는다.

민과장은 무료수술 등의 특별한 인술(仁術)을 베풀지는 않았지만 주인공 부자에겐 그 정도로도 ‘고마운 선생님’이다.

요즘 같은 세태에 유독 의사들에게만 ‘히포크라테스 선언’이니 ‘슈바이처 정신’ 등을 내세우며 높은 도덕성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훌륭한 의사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모범사례를 모든 의사의 행동기준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문제는 최소한의 직업윤리다. 재폐업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묻고 싶다. 사랑하는 당신 가족이 당장 의사를 필요로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당신 가족을 제외하고는 ‘남’이니까 ‘국민 여러분, 이제 건강하셔야 합니다’라는 무책임한 광고 한마디로 족한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의사들의 재폐업으로 ‘준전시(準戰時) 상태’에 놓여 있다. 암환자 등 중환자들이 방치돼 있는가 하면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맞서 시민단체와 환자가족들이 규탄대회를 여는 등 의사와 시민간에 적대감 또는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신문에는 응급환자 발생시 이용 가능한 군(軍)병원 명단과 전화번호까지 등장했다.

현행 의약분업 제도가 의사들에게 불만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낮은 의료수가 문제도 이제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명분이 서는 것은 아니다.

전시에 부상한 적군도 돌보는 것이 의사의 기본인데 하물며 죽어 가는 무고한 시민을 외면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의사와 환자간에 가장 중요한 ‘신뢰관계’가 더 이상 금이 가서는 안된다. 병상을 지키면서 ‘투쟁’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이번 사태는 ‘사법처리’를 주무기로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어쩌구저쩌구…’ 협박하는 방법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못된다.

<육정수기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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