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 21]공연예술의 최고전당 '뉴욕 카네기홀'

  • 입력 2000년 7월 25일 18시 50분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피에르 블레주, 제임스 레바인, 볼프강 자발리쉬, 마리스 얀손스, 마이클 틸슨 토머스, 피터 제르킨, 안드라스 쉬프, 마우리치오 폴리니, 제시 노먼, 캐슬린 배틀, 체칠리아 바르톨리….

2000년 7월 뉴욕 카네기홀 안내판에 걸린 ‘2000∼2001년’ 공연 스케줄을 봤더니 현존하는 간판급 지휘자와 연주자 이름이 대부분 올라와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입장권 가격이 250달러나 됐지만 내년 3월치까지 거의 매진이라 했다. 메인홀(2804석)을 유료관객으로 꽉채운다 해도 한 회 공연 수입 70만달러(약 8억원).입장료 수익만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개런티를 요구하는 아티스트를 끊임없이 무대에 세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애당초 수지타산 맞추기가 불가능한 공연이 쉼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비밀은 뭘까.

카네기홀의 운영을 책임진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제이 골란 감독(개발기획부)은 “튼튼한 재무 구조 덕분”이라고 요약했다.

“연 200여개 공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경비 1700만달러(한화 약 190억원) 중 98%를 자체 조달합니다. 이중 티켓 판매대금은 30%에 불과합니다. 후원자들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증권등에 투자해 얻는 수익 30%, 카네기홀 임대수익 30% 등이 재정독립의 기반이죠.”

1999년 카네기홀 재무보고서에는 ‘카네기식 경영’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경상 경비(3949만달러)와 수입(2450만달러)을 맞춰보면 1499만 달러가 적자. 그러나 입장료와 공연장 등 임대료를 합한 ‘영업 수입’외에 후원금(991만달러), 주식배당금과 평가이익 등 기부금 투자수익(742만달러) 등이 1897만달러에 달해 부족분을 메우고도 398만달러나 남았다. 카네기홀의 투자항목을 보니 주식 등 유가증권은 물론이고 각종 수익증권과 일반 기업 출자까지 구성이 다채로웠다.

“이익금은 재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적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카네기홀 순자산이 1억7000만 달러가 넘습니다.”

카네기홀이 처음부터 유럽의 내로라하는 공연장들이 앞다퉈 벤치마킹하려는 ‘알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1891년 설립 이후 적자를 면치 못했던 카네기홀은 1955년 건축개발업자에게 팔려 헐릴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러나 뉴욕의 유서 깊은 명소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는 반대여론이 들끓자 뉴욕 주정부는 1960년 카네기홀을 500만 달러에 사들여 비영리조직인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에 운영을 맡겼다.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할 대목은 주정부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돈을 대준 것이 아니라 자립이 가능한 구조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카네기홀 건물은 팔리지 않게 보존해 줬으니, 그 나머지 충당비용은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이 경영을 통해 창출하도록 ‘간접지원’ 방식을 택한 것. 실제로 카네기홀이 99년 뉴욕 주정부와 시정부에서 직접 지원받은 돈은 전체 소요경비 1700만 달러 중 110만 달러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초대 대표로 추대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1년치 티켓을 예매하게 하는 캠페인을 시작으로 자립 경영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기부금 모금에 발벗고 나서 현재 1만5000여 구좌에 이르는 기업과 개인을 후원자로 끌어들였다. AT&T를 비롯해 200개가 넘는 쟁쟁한 기업이 있지만 연간 기부액 1999달러 이하인 개미 기부군단(‘카네기의 친구들’)도 1만3000명이나 된다. 기부금을 현금만이 아니라 기업의 주식, 부동산으로 기탁받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골란감독은 마치 상품을 파는 기업이 단골을 확보하듯, 후원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의 주요 업무라고 강조했다.

“돈을 낸 만큼 후원자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연 관람의 우선권을 주고 입장료를 할인해주는 것을 비롯해 갈라 콘서트, 유명 아티스트와의 만찬 등을 수시로 마련하죠. 원할 경우 기탁자의 이름을 새긴 고정 좌석도 마련해 드립니다.”

공연 안내책자 뒤편에 연간 2000달러 이상 기부한 개인과 회사의 명단을 일일이 밝히는 것도 비슷한 취지다. 내로라하는 재력가들이 카네기홀 후원자가 되는 것을 상류층의 명예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하지만 후원금을 모으고 운용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지난 5월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욕의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센터의 활동 중단은 그 어려움의 단적인 사례. 오랜 적자에 시달리던 현대무용센터는 1998년 뉴욕 이스트 63번가 건물을 팔고 외곽으로 이사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재정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모든 공연일정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기부자들이 현대무용센터의 론 프로터스 예술감독의 ‘실정’에 등을 돌리는 바람에 고작 50만 달러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경영부실의 책임이 있는 CEO를 개미군단 주주들이 밀어내듯 기부자들이 경영권을 행사한 셈이다.

기부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투자’와 ‘수익’개념이 핵심인 뉴욕. 무대 위에서 고결한 아리아가 울려퍼질 수 있게 하는 것은 무대 뒤의 치열한 문화경영이다.

뉴욕=윤정훈 기자 digana@donga.com

카네기홀은 기부금 등을 통해 운영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공연장이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왼쪽 사진은 카네기홀 운영책임자인 아이작 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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