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호표/해파리와 해리 포터

  • 입력 2000년 7월 13일 19시 01분


요즘의 40대. 한 친구가 당장 떠오르는 4자성어(四字成語)를 대라고 했다. 머뭇거리다 내뱉은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 하나를 더 대라고 해 튀어나온 게 린칭샤(林靑霞) 주연의 영화제목인 ‘동방불패(東方不敗)’.

첫번째 것이 인생관이고 두번째가 애정관이란 설명이다. 그 친구는 현행법상 부적절한 교제를 하는 한 여성은 ‘사면초가(四面楚歌)’와 ‘이판사판’을 대더라고 했다.

아날로그세대의 마지막 보루라는 40대의 썰렁함일까. 세대의 계단을 내려가 보자.

초등학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에 삼행시가 유행이다. 누구나 알 법한 삼행시 ‘해파리’를 보자.

해:해파리야

파:파리가 널 사랑한대

리:리얼리?

다음은 E메일 문화. 한 20대 여성은 하루 평균 4건의 E메일을 보낸다. 메일 당 1000자 정도다. 또 동창회 사이트에 10여 차례 들어가 한번에 300자쯤 글을 올린다.

지난 세기는 영상문화의 시대로 자리매김됐다. 문자문화가 사라지거나 위축될 것이란 예측이 강했다. 그러나 디지털문화시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전화로 수다를 떨던 ‘말의 시대’는 인터넷 대화방의 ‘필담’으로 대체됐다. 삼행시는 운(韻)을 띄우면 시를 짓던 이몽룡시대로 시간여행하는 느낌이다.

한 세기 만에 되돌아온 ‘문자의 시대’. 그런데 그 내용을 보라. 곤충(파리)이 바다에 사는 강장동물(해파리)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같은 ‘파리’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전개에서 창의력을 찾을 수 있을까. 해학이나 풍자가 있는 걸까.

해파리의 나라인 바다를 건너가 보자. 아날로그매체의 총아인 책으로 나온 영어동화 ‘해리 포터’ 시리즈. 아이들에 대한 꿈의 마케팅에 전세계 어른이 더 요란하다. 어떤 이는 마법으로 엮어내는 환상의 세계와 기발함에 매료된다고 하고 다른 이는 구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어떤 아이는 ‘You’를 ‘Yer’로 쓴 것과, 실생활에선 금기인 ‘fat kid(뚱보)’란 표현이 신선하다고 한다.

요컨대 콘텐츠다. 그것도 상상력에 기반한 새로운 콘텐츠다. 디지털시대를 비웃는 듯한 길고 두꺼운 아날로그 콘텐츠, ‘해리 포터’. 불행히도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은 상상력 자체도 매뉴얼이 돼 버린 환경에 살고 있다.

미국 뉴욕주 동네서점에서 1996년에 산 ‘스컬래스틱 어린이사전’은 ‘해파리(jellyfish)’를 ‘바다생물로 젤리처럼 부드럽고 흐물거리며 촉수가 늘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그림에서 보듯 몸의 가운데에 입이 있고 더듬이나 팔은 그 입에서 뻗어 나와 있다’고 덧붙인다. 옆에는 해파리의 상세한 부위별 설명이 붙은 단면도가 있다. 해파리의 내부 구조와 특징까지 한눈에 알려준다.

서울 교보문고에는 10여종의 초등학생용 국어사전이 꽂혀있다. ‘해파리’가 없는 사전도 있다. 비교적 괜찮은 ‘학습국어사전’은 ‘해파리’를 ‘해파리류의 강장동물을 통틀어 일컫는다. 몸은 우산 또는 종 모양으로 흐물흐물하고 물위에 떠서 살며 몸의 아랫면에 촉수가 있음’으로 설명한다. 옆에는 해파리의 작은 전신 그림이 설명없이 실려 있다.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에는 구체성과 각론, 새로움이 부족하다. 아이디어의 확장이 드물다. 아이들은 이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해파리’ 삼행시를 공허하게 읊는지도 모른다.

홍호표<부국장대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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