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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6월 21일 2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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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이래 만저우(滿洲)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과 연해주의 소련군이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한인들이 일본군을 도왔다는 것이 스탈린이 강제 이주를 지시한 이유였다.
당시 정치적 이유로 강제이주된 민족은 한인들뿐만 아니라 독일인 유대인 체첸인 등 여러 민족이다. 소련이 붕괴한 뒤 서방 출신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인들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며 대부분 현지에 그냥 살고 있다.
이들이 현지를 떠나지 않은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땅하게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18세기 이래 독일 출신의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청으로 러시아 남부 볼가강 하류에 이주해 살다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침략해오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50만명이나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본인의 귀환의사와 몇마디 독일어 테스트만으로 통일 독일로 돌아갔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조국도 부르지 않았고 갈곳도 없었다.
둘째, 한인들은 다른 소수민족과는 달리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으로 꼽혀 동화가 잘됐기 때문에 그동안 땀흘려 닦아놓은 생활터전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셋째, 독립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다민족 공존정책 때문이었다. 120여개 다민족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 강경세력의 부상과 민족분쟁을 국가안위에 가장 큰 위협으로 보고 국내 과격 이슬람세력을 견제하면서 여러 소수민족이 자기네 말과 문화, 전통을 이어가도록 하고 각 민족이 사이좋게 살게 하고 있다.
온건 이슬람국가인 우즈베키스탄에는 이슬람사원은 물론 러시아정교교회, 가톨릭성당, 한인교회들이 있고 고려인들은 어느 교회에나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언어도 독립 후 자국어를 국어로 회복했지만 오랫동안 사용해온 러시아어를 혼용하게 하는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현지에 진출한 우리 교민들의 경제활동과 봉사활동, 그리고 한국정부의 외교노력 때문이다. 수교 이후 현지에 투자한 우리 기업의 활발한 경제활동과 정부 차원의 정상외교와 경제협력은 선진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고려인들의 가슴을 활짝 펴게 해주었다.
이들 고려인이 민족주의의 탄압을 받고 있어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연해주로 집단이주시켜야 한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를 보면 안타깝다. 이는 사실과도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현지에 잘 정착해 사는 대다수 고려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해주로의 이주를 원하는 고려인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6∼7년 전 타지키스탄 내전을 피해 나온 6000∼7000명의 고려인이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에 잘 정착했고 일부는 연해주로 갔지만 아직까지 정착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지금도 나라가 자리를 잡지 못해 불안한 타지키스탄에 남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 발틱 등 옛 소련 연방에서 동화하지 못하고 있는 소수 사람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연해주에 연고가 있거나 희망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는 중앙아시아 35만명의 고려인들에 비해 매우 적다. 오랫동안 옛 소련의 그늘에 가려졌던 중앙아시아에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국력이다. 현지 고려인 지도자들과 우리는 그들이 또 다른 시련을 시작하기보다는 평생을 살아온 현지에서 뿌리내리고 훌륭한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계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 외교 경제적으로 꾸준히 지원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최영하(전 駐우즈베키스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