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대호/두더지게임은 그만하자

  • 입력 2000년 6월 21일 19시 18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거래소는 영국의 런던에 있다. 그 고색 창연한 벽에는 라틴어로 ‘딕툼 메움 팍툼(Dictum Meum Pactum)’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나의 말 한마디는 바로 문서’라는 뜻이다. 그만큼 신용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금융은 신용을 토대로 움직인다. 서로 믿지 못하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앵글로색슨 족이 유난히 금융에 강한 이유도 신용을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지금 우리는 심각한 금융 위기를 맞고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라 경제가 또 한차례 마비될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 거래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도 여기서 촉발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중견기업들이 회사채와 기업어음의 유통 마비라는 함정에 걸려 죽어 나가고 있다. 종금사의 인출 사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추세로 가면 IMF 3년차 증후군에 걸려 멕시코처럼 다시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자금난이 오게 된 이유는 시장의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채나 기업어음은 담보가 없기 때문에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신뢰 상실의 중심에는 금융당국이 있다. 금융구조조정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하면서 원칙을 자꾸 흔들고 말도 수시로 바꾸고 있다. 대우 도산 등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자꾸 벌어져왔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나름이다. 구조조정의 근본 방향이 흔들린다면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방향이 흔들린다기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상태에서 땜질 처방만 남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이 오락가락하게 되고 신뢰는 무너져 내리게 된 것이다. 은행구조조정이 널뛰기 정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은행은 지난 2년간 살을 깎는 구조조정을 했다. 간신히 살아난 은행들은 정부가 대우 부담을 안기는 바람에 다시 부실해졌다. 다급해진 정부는 금융지주회사법을 내놓았다. 6월말을 기준으로 재무구조를 점검해 통폐합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살아남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대출 중단이라는 해프닝이 빚어지고 있다. 건전성을 측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이려면 가급적 대출을 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는 자금난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투신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우채에 대해 80%와 95%를 지급해 주도록 한 정부의 조치가 투신의 부실을 불렀다. 그러고도 손실을 보장해 주는 대책은 자꾸 늦어지고 있다. 투신사로서는 고객에게 돌려줄 돈을 마련하느라 보유 주식을 마구 팔고 있다. 구조적으로 주가가 올라가기 어렵게 되어 있다. 주가 하락은 기업의 재무구조를 악화시킨다. 이는 또 자금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금난의 악순환을 풀지 못하면 금융은 무너진다. 그 결과는 나라 경제의 파탄일 것이다. 대책회의를 자주 여는 것을 보면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나오는 대책이란 것은 단선적이고 옹졸하기 짝이 없다. 야당의 비난이 무서워 공적 자금도 제대로 조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일부 각료들은 사후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소극적인 대응만 하고 있다. 청문회가 무서우면 애당초 공직은 맡지 말았어야 했다.

정부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IMF관리체제를 처음 수습하기 시작하던 때의 비장한 각오 없이는 위기 탈출이 어려울 것이다.

김대호<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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