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렇군]정재승/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 입력 2000년 6월 9일 23시 50분


나는 한때 영화 배우 안성기씨와 같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이용했고 안성기씨는 배우 심은하씨와 ‘미술관 옆 동물원’을 함께 찍었다. 따라서 나는 두 다리만 건너면 심은하씨와 아는 사이다. 우리 실험실의 박사과정 학생인 데이빗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했던 클레어 데인즈와 친구다. 내가 만약 데이빗을 조른다면, 데인즈를 통해 디카프리오의 사인을 건네 받을 수도 있다.‘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서양 속담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한 계산에 따르면, 우리는 일생동안 대략 3000 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150명과 친구로 지낸다고 한다. 한 사람이 대략 알고 지내는 사람을 300 명이라고 가정해도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은 그 제곱인 9만 명. 4단계 건너 아는 사람은 무려 81억 명. 지구 위에 사는 60억 인구가 4단계면 모두 아는 사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 계산법에는 사람들이 거리의 제한없이 인간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가정이 숨어 있다. 이 가정대로라면, 아프리카의 추장이 알고 있는 300 명중에는 샤론 스톤이 끼어 있을 수 있고, 북극의 에스키모에게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만 벗어나도 아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인간관계를 주변 사람들로만 국한한다면,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는 사람이 줄리아 로버츠의 사인을 건네 받기 위해서는 1000만 명의 손을 거쳐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두 상황의 중간 어디쯤 놓여 있다. 대개 주변 사람들과 인간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민이나 이사로 불쑥 먼 지방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도 하고, 사업이나 여행으로 낯선 사람을 소개받기도 한다.

1998년 미국 코넬대학교 응용 물리학과 박사과정 던컨 와츠와 그의 지도 교수 스티브 스트로가츠는 실제 인간 관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해 화제가 됐다. 그들의 논문에 따르면, 잘 짜여진 네트워크 연결에서 몇 가닥만이라도 엉뚱하게 가지가 뻗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달하는데 필요한 단계’가 급속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먼 동네 사람을 몇 명만 알고 있어도, 이 거대한 사회가 몇 단계만에 누구에게든 도달할 수 있는 ‘작은 세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 당신에게 찾아와 “내가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해도 넘어가지 마시라. 당신도 알고 보면 그 사람만큼 청와대와 가깝다.

정재승<박사·예일대 연구원>jsjeong@boreas.med.yale.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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