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신일철/남북간에도 정식國號 사용하자

  • 입력 2000년 6월 7일 19시 27분


지난달 18일 발표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의 내용은 15항으로 돼있는데 정작 획기적인 뉴스는 그 문서 맨 마지막에 있다. 그 합의서 서명란에 있는 ‘대한민국 통일부차관 양영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 김령성’이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1992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 분단 55년 만에 두 번째로 남북합의서에 국호가 명시된 것이다. 판문점 협상합의의 서명자 직함에 상호간의 국호를 명시한 것은 새역사를 창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은 서로간에 마땅한 호칭을 쓰지 못했다. 한때는 서로를 괴뢰라고 했다. 우리 한국의 이북지방에는 ‘북괴’ ‘북한괴뢰’가 있다고 했고, 북한측은 우리를 ‘남조선 괴뢰’라 칭했다.

그러나 적어도 남과 북은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로 국호를 명시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시인과 평화공존을 약속한 것이 된다.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에도 합의 주체가 표제에는 그저 남과 북이었다.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때는 엄연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정식 국호를 가지고 가입했다. 적어도 유엔 동시가입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서로 다른 두 국호를 가진 2개의 정치단위임을 널리 공약했으므로 그 이후에는 남과 북이 서로 정식국호를 가지고 상대방을 호칭해야 옳았다.

경직된 통일명분론은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2개 분단국가는 결국 기형적인 두 변형국가의 모양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은 한때 우리 한국을 소위 ‘공화국 남반부’라고 하고 한국은 북한을 한국의 미수복지역이라고 했던 것이 과연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에 도움이 됐는지, 역기능만 초래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따져볼 때가 왔다.

국제관계의 외교용어로 ‘알리바이’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에서 온 ‘알리바이’란 ‘부재증명’ ‘존재부인’을 의미한다. 1970년 초에 미국의 민주당 진보파 이론가였던 체스터 볼스는 미국 정부에 대해 중공에 대한 ‘알리바이’정책을 그만둬야 한다고 권고했다.

71년 2월 25일 닉슨 미국대통령은 드디어 중국 대륙에는 미국 외교의 공식적인 상대가 존재한다는 발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처음으로 시인했다. 이것이 미국과 중국의 국교로 이어졌다.

1970년 서독의 동방정책 제창자인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독을 공식적으로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론을 무릅쓰고 동독을 ‘독일민주공화국’이라고 처음으로 공칭했다.

우리 한반도의 남과 북은 세계 100여개 국가와 국교를 맺고 있으며 이미 일본과 미국도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또는 DPRK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와의 외교관계에서는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는 존재시인이 되고 있으나 오직 우리 민족 남북 사이에만 서로 상대방의 공식 국호를 기피해 온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에서 서로의 국호를 다시 사용한 것을 계기로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정상 명칭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상이란 고명한 회담 주체가 명시된다면 남북한 관계 개선의 획기적 전환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이 상호주의적으로 우리는 북을 ‘북조선’으로, 북측은 우리를 ‘한국’으로 공칭하는 상호 존재시인의 보편화가 시작되기를 제언해 본다. 남북한간의 존재시인을 주저하는 허위의식의 가면도 이제는 벗어던져야 한다.

1969년 10월 브란트 서독 총리의 명언을 한국에 옮기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 코리아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두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니라 다만 특수관계일 뿐이다.”

신일철(고려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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