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감독 포커스]"홍상수만의 독특한 영화나라"

  • 입력 2000년 5월 26일 14시 04분


사건들과 등장인물의 성격에 관해 말해지지 않은 간극과 틈은 홍상수 만의 독특한 영화나라를 꾸며낸다. <오! 수정>은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여유 있는 호흡으로 일부러 그 틈을 열어놓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대명천지에 일어난 이 희한한 구경거리에 우물가에 모여들며 왁자지껄했다. 우물에는 돼지가 빠지고 난 흔적에 물거품만 일어나고 사람들은 물 속으로 사라진 돼지 대신 물 표면에 비친 익숙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머쓱해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머쓱했지만 도대체 달라질 것 없는 삶이 섬뜩했을 것이다. 머쓱하면서도 섬뜩한 체험이 홍상수 영화의 관람 체험이다.

홍상수 영화에는 늘 관계 맺기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지겨운 일상에서 눈을 돌려 누군가를 만난 그들은 달콤한 만남을 꿈꾸며 멜로 드라마의 세계로 가려는 그 순간에 파국의 함정에 빠진다. 성교는 짝짓기를 완성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체험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성교조차도 그토록 열망한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파탄으로 치닫는다. 성교는 파국이거나 파국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강원도의 힘>에서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던 유부남 대학 강사 상권이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지숙을 데리고 음습한 여관에 들어가 성교를 하느냐 마느냐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의 처참한 정서는 떨쳐 버리기 힘들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소설가 효섭은 남편이 있는 보경과 성교하면서 부질없이 "내 거라고 말해 줘"라고 말하며 속삭인다. 보경의 남편인 동우는 출장 길에 다방 종업원과 성교하면서 아내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춘부에게 "사랑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신음하다가 콘돔이 찢어지자 화들짝 놀라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홍상수 영화의 절정에는 성교가 있지만 그 성교는 파국에 이르며 죽음이 따라다닌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효섭은 자기를 짝사랑했던 극장 여 종업원 민재와 성교하다가 민재를 짝사랑했던 민수에게 죽임 당한다. 보경은 약속했던 장소에 오지 않은 효섭을 기다리다가 옥상 끝에 있는 효섭의 자취방에 찾아와 방안에 죽어 있는 시체의 존재는 모르는 채 바깥에서 평화로운 봄 햇볕을 쐬며 무심하게 기다리고 서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파트 거실에서 보경이 효섭의 살해 소식이 실린 신문을 읽는 것으로 끝난다. 보경이 그 신문기사에서 효섭의 죽음을 알았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베란다에 보경이 서 있는 이 장면의 해방감은 모호하다.

<강원도의 힘>에서도 남녀 주인공 상권과 지숙의 1, 2 부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것은 한 여자의 죽음이며 상권은 그 여자를 사귈 뻔하고 지숙은 그 여자가 죽었다는 얘기를 성교를 나눌 뻔한 경찰관에게서 듣는다. 홍상수 영화에 지겹도록 따라 다니는 수식어 일상의 실제 결에는 죽음과 탄생, 회귀, 순환이라는 흔히 비 일상적이라고 여기는 섬뜩한 사건들이 묻어 있다. 그것도 사실은 일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홍상수는 겉으로 지루하고 초라한 것 같은 일상의 사건에 극적인 사건을 배치해 놓고 무심한 척 하면서 사건들의 표면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겹쳐놓고 순환시키면서 일상 삶의 폐쇄성과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효섭과 보경과 동우와 민재와 민수는 서로 모르는 채 같은 공간을 스쳐 지나가고 빗겨가기를 되풀이한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과 지숙도 강원도의 똑같은 공간을 비슷한 시차를 두고 여행하고 있다.

이 되풀이된 일상의 정경에서 홍상수는 각운을 맞추고 대구를 이루고 아이러니를 만든다. <강원도의 힘> 1부에서 지숙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기 연민에 차서 통곡하고 있지만 2부의 상권은 강원도로 떠나기 직전 후배를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눈꼽을 떼 내고 있다. 1부에서 지숙은 죽어 있는 금붕어를 뜬금 없이 산길에서 발견하지만 2부에서 상권은 금붕어를 출판사 사무실에서 연구실로 가져온다. 한 사람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죽어 가는 것을 살린다. <강원도의 힘> 끝은 연구실에 돌아온 상권이 창가에 놓인 대야에서 금붕어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것을 보는 장면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대야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는 출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삶의 순환적인 폐쇄성에 가 닿고 있다.

등장인물과 상황에 거리를 두고 관찰할 여유가 생긴 것일까. 홍상수 영화는 갈수록 경쾌해진다. <오! 수정>과 그 이전에 만든 두 편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의 이야기 전제는 똑같지만 결말은 달라졌다.

사랑과 그 절정에 섹스가 있고 그 섹스는 파국에 이르며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흐름은 이제 <오! 수정>에서 `연인만 짝을 이루면 만사형통'이라는 결혼 다짐을 보여주는 가벼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강원도의 힘>에서 기다리자는 상권과 기다리지 못하겠다던 지숙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남녀 관계는 성교를 나누자는 재훈과 좀 더 기다리자는 수정의 실랑이로 바뀌었지만 마침내 두 사람은 함께 몸을 나누는 목표에 도달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이 막 연애를 시작한 설레는 순간이 아니라 파국과 권태가 기다리는 관계의 하강 국면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오! 수정>은 관계의 완성(이라고 믿는)을 향해 바삐 가는 남녀의 상승 관계를 그렸다.

<오! 수정>은 흑백 화면으로 공간의 현실성을 탈색시키고 시점의 차이가 아닌, 남녀 주인공의 기억의 차이에 따라 에피소드를 겹쳐 나열하면서 전작들에 깔려 있었던 유머감각을 훨씬 따뜻하게 화면에 포개놓는다. 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적인 대화 소통에 실패하는 말장난을 구사했던 것이지만 <오! 수정>은 정도가 심하다. 급기야 성교를 나누다가 재훈은 수정이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어쩌면 의도'라고 생각하는 수정과 `어쩌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재훈의 기억의 편차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상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오해를 거친 접촉을 통해, 빙 둘러 가는 접촉을 통해 힘겹게 관계 맺고 있다. 피곤하게 말 실랑이를 나누며 영원할 것 같은 기다림을 겪고 뜬금 없는 말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홍상수는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무심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조각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가능한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심지어 남녀 주인공의 기억에 따라 나눠진 <오! 수정>의 이야기에는 그들 기억과는 상관없이 제 3자인 방송 PD 영수의 이야기까지 끼워 넣음으로써 항아리처럼 단단하게 완결된 이야기의 규칙에 저항하고 있다.

더불어 이 홍상수의 나라, 일상의 세계는 인간끼리의 접속이 힘들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은 가족들과 외출하다가 느닷없는 차의 후진에 아들이 다칠 뻔 하자 심하게 화를 낸다. 위험은 일상에 늘 산재해 있다. <오! 수정>에서 수정은 재훈과 첫 관계를 맺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다가 남산 케이블카를 타는데 산 중턱에서 케이블카는 고장난 채 매달린다. 삶이란 고장난 케이블카처럼 언제 어디서 위험에 처할지 모르고 유치하며 잠깐 행복한 체험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수정의 젖가슴에 매달리며 삽입 성교를 떼쓰는 재훈, 예술을 지향하는 삼류 PD 영수와 부잣집 아들 재훈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가난할 뿐만 아니라 정신이 이상한 오빠에게 수음을 해줘야 하는 불우한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수정, 재능 없이 친척의 힘에 얹혀 살면서도 좋은 영화 만들기를 열망하는 영수나 모두 그 고장난 케이블카 같은 삶을 스스로 구원하기에는 힘이 부친다. 그런데도 재훈은 수정의 처녀를 얻고 자신의 모든 결점을 고치겠다고 선언하며 수정은 막 행복한 삶의 제도권으로 진입했다고 수줍게 기쁜 미소를 짓는다.

홍상수 영화는 즉흥으로 찍어내면서도 대단히 양식화 돼 있다. 그의 예술적 무의식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삶의 파편을 조립하는 파격을 지향하지만 일상에 완강하게 고착된 그의 패배주의와 자학은 언제나 정연한 꼴로 영화를 맺음 한다.

<오! 수정>은 그렇게 충돌하는 홍상수의 무의식과 세계관 사이에서 희미하게 나마 화해의 흔적을 드러내고 형식적으로는 더 나아간 해체의 꼴을 겨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할 뻔한 <강원도의 힘>의 주인공 상권이 바락 화를 내는 것과는 달리 <오! 수정>에서 수정은 고장난 케이블카 안에서 옆 좌석의 우는 아기를 의젓하게 달랜다. 마치 언제 꺼질지 모르는 호수의 얼음 가에서 재훈과 수정이 달콤한 뽀뽀를 나누듯이 <오! 수정>은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여유 있는 호흡을 보인다.

그런 호흡으로 홍상수는 지금까지의 퇴행적인 자세를 슬쩍 떨쳐버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어느 때보다 과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비틀고 이야기를 조각 내고 있다. 홍상수는 스스로 "너무 쉽게 정리된 삶에 대해 저항하겠다"고 말한 것의 미학적 완성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이야기체 영화의 잘 빚어진 항아리 같은 완성도를 거스르면서 현대 삶의 혼란과 공허를 담아 극적 진공상태를 만들어내는 서구 모더니즘 영화의 꼴과도 조금 다른 형태를 겨냥하고 있다.

홍상수 영화에서 사건들과 등장인물의 성격에 관해 말해지지 않은 간극과 틈은 홍상수만의 독특한 영화나라를 꾸며낸다. 이때까지 그의 영화는 구성이 너무 꽉 짜여 있어서 벽돌 하나 하나가 꽉 찬 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고 이어지지 않는 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 수정>에서는 일부러 그 틈을 열어놓고 있다. 다시 짜 맞춰도 소용없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번거롭다고 불평해도 소용없다. 다시 말하지만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 영화다.

김영진

기사 제공: FILM2.0 www.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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