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총선 민의의 두 갈래 해석

  • 입력 2000년 5월 25일 19시 59분


너무 빨리 찾아온 기회가 너무 일찍 판을 뒤집었다? 엊그제 만난 한 야당인사에게 운을 떼자 그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달 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만나 이른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DJ가 어떻게 하든 (여소야대 구도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기는 할텐데 그게 언제쯤일까, 아무래도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뒤에야 무슨 일을 벌여도 벌이겠지 생각했지요. 그런데 불쑥 박태준(朴泰俊)총리의 명의신탁건이 터졌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DJ는 그냥 넘기지를 못하는군요.”

‘논리’와 ‘책략’

이 말대로라면 한달 전의 여야(與野) ‘영수회담’은 사실상 시간을 벌기 위한 ‘위장극’에 불과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진위야 여하튼 눈앞에 드러난 결과는 그런 셈이 되고 말았다. 청와대와 민주당측은 물론 펄쩍 뛴다. 총선기간 동안 자민련측이 아무리 모지락스럽게 굴었어도 우리는 그저 부부싸움으로 각 방 쓰는 셈 쳐왔으니 다시 합방을 한들 그게 무슨 몹쓸 짓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민련과의 공동정부는 국민과의 약속이고 그동안 자민련과의 공조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해왔기 때문에 두 당의 공조복원에 대해 야당이 이러쿵저러쿵 할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일견 단순하고 명쾌한 듯한 논리다. 그러나 그만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책략’이다. 차라리 톡 깨놓고 여소야대로 ‘대화와 협력의 정치’를 해볼까 생각 안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반개혁적인 한나라당’에 끌려다니면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했다, 이 정권 남은 절반의 기간 동안 무언가 이뤄내려면 원내 다수당이 돼야 하고 그런 만큼 자민련의 17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렇게 서두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침 총리 자리가 비게 돼서 어쩔 수 없었다, 양해바란다,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나 양해란 상대가 하는 법. 야당은 둘째치고 국민 다수가 그런 일방적 논리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 여권으로서는 군색한 ‘공조 복원 타령’밖에 내세울 게 없을 것이다.

4·13총선 결과에서 나타난 민의(民意)는 여소야대의 양당구도. 여야당 어느 쪽에도 원내 과반수를 주지 않으면서 야당에 18석을 더 준 유권자의 뜻은 여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야당인 한나라당도 이제는 더이상 ‘발목잡기’나 하지말고 원내 제1당으로서 국정운영에 공동책임을 지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충실한다면 원내교섭단체 정족수에도 미치지 못한 자민련은 사실상 그 존립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존립의 의미를 상실한 정파의 ‘얼굴’을 총리자리에 앉히고 그 ‘수장’과 ‘딜(뒷거래)’을 하면서 총선민의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사에서 여대야소는 대통령의 국회지배를 의미하고 그것이 대의정치 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왔다는 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구나 여대야소라고 국정이 제대로 굴러간 경우도 드물다. 기회 있을 때마다 민주화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현집권세력이 뒤로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수의 논리, 힘의 정치’에 집착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저쪽’의 생각?

이런 아이러니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여권의 한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총선 민의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영남권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승리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에 의한 영남권의 한나라당 싹쓸이로 진정한 민의가 왜곡됐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본다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꾸는 것은 왜곡된 총선 민의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쪽(권력 중심)’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도덕적 우월성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이 되면 ‘소수 정의, 다수 불의’의 상극(相極)으로 치닫는다. 남는 것은 불신과 대결의 정치뿐이다. 한달 만에 끝장난 ‘상생의 정치’라니 기가 막히다. 진정 총선 민의를 겸허하게 해석했다면 정치가 이 꼴이 될 수는 없잖은가.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