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公교육 죽이자는 건가

  • 입력 2000년 5월 8일 19시 47분


현대의학은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밝혀낼 정도로 발달했다. 그러나 하찮아 보이는 감기에 대한 특효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다.

감기에 대한 처방은 대증요법(對症療法)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감기의 대표적인 증상인 고열과 콧물 그리고 기침 등을 다스리면서 근본 원인인 바이러스의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감기는 사람을 괴롭히기는 한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그렇게 심각한 병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심각하게 빼앗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의학자들이 감기를 집중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고 대증요법으로 다스리는 이유라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과외금지를 위헌이라고 결정한 이후 대증요법식 처방이 잇따르고 있다. 교육부는 장관이 대통령한테서 심한 질책을 받은 뒤 ‘과외교습 대책’을 내놓았지만 그것으로 고액과외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정부의 공교육 정상화 방안이라는 것도 ‘공교육 위기’나 ‘교실 붕괴’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마당에 중고교 교육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학의 학생 선발방법마저 공교육을 살리기는커녕 죽이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내년부터 100여개 대학이 토플이나 토익 점수가 우수한 학생들을 특별전형으로 뽑기로 했다. 영어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교육평가기관인 ETS가 65년부터 시행해온 토플은 전세계에서 연간 85만명이 응시할 정도로 평가의 객관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연인원 15만명 정도가 이 시험을 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험의 주목적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의 학생이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에서 공부하는데 필요한 영어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시험 내용도 영어권에서 생활하고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를 듣는데 필요한 것들 위주로 돼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가 많은 것도 아니고 대학이 유학생을 선발하는 것도 아닌데 왜 토플이나 토익 고득점자를 우대하겠다는 것인가.

대학이 요구하는 토플 점수에는 말하기와 쓰기에 대한 평가가 포함돼 있지 않아 종합적인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적합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상적인 중고교 교육과정으로는 토플 토익 고득점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영어학원에 다니거나 개인지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서울 강남의 유명 영어학원에는 토플이나 토익을 준비하는 중고생들이 적지 않다.

각 대학의 토플 토익 성적 우수자 우대정책이 노리는 긍정적인 효과가 없을 리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무너지는 학교를 일으켜 세우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학은 학생선발 방법이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공교육 현장의 고질(痼疾)은 감기보다 훨씬 심각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문제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권순택(지방자치부 차장)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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