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뒷거래’ 세상

  • 입력 2000년 5월 4일 19시 06분


해묵은 책갈피를 뒤지다 무릎을 치게 된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편지 한장이라도 절도가 있어야 한다. 요행을 바라고 모여드는 무리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이다. 문민정부 시절 무기중개상 린다 김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가 난처해진 장관 의원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편지 한장’ 때문에 집안에서 닦달당하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으니 과연 고전의 통찰 혜안이 무서울 정도다.

▷고위직의 뒷거래 증거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편지에서 묻어나는 애틋한 로맨스의 언어들은 청춘들의 그것이 주는 울림을 능가한다. 그 절절한 연서의 표현들이 국민의 서글픔과 분노로 이어진다. 그 바쁜 공직의 요인들이 연서나 끼적이며 소일했었나 하는 배신감인 것이다. ‘사랑하는 린다에게’ ‘계획대로 추진하니까 회사에 린다의 역할을 부각시켜요’ ‘내가 누차 말했듯이 당신이 나를 보호해야 한다’. 과연 일국의 국방부 장관 처신이 이럴까 싶다.

▷공(公)이라는 글자의 어원은 사사로운 것을 떨어내는 것이라고 자원(字源)대사전은 적고 있다. 그리고 영어의 공직 직무, 오피스는 라틴어의 ‘의무’ ‘봉사’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공직자 본연의 자세는커녕 무기 중개상 여인의 수작에 놀아난 데서 공직자들의 허술한 몸가짐, 모럴 해저드를 확인한다.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대사로 나간 이는 노름 유혹을 이기지 못해 파탄을 맞았다. 일은 뒷전이고 대사관에서 몇십㎞나 떨어진 도박장에 출근하다시피해 현지 정보기관에 포착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가곡 ‘비목’의 작곡가인 장일남교수가 새 교수 채용을 둘러싸고 돈을 2억원이나 받아 검찰에 구속되었다. 연예인들의 이른바 ‘성 상납’ 매춘 보도 이후 TV를 켜면 역겹다는 사람도 있다. 공인(公人)으로 대접받는 이들의 세계도 뚜껑을 열어보니 마찬가지라? 누구를 믿고, 어디에 마음을 붙여야 할 것인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칙칙한 뒷거래 냄새와 부도덕의 반향만 이명(耳鳴)처럼 울린다. 공직의 기강도 사회 규범도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오늘이다.

<김충식논설위원> sear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