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배인준/강한 사슬의 약한 고리

  • 입력 2000년 5월 4일 19시 06분


아마도 18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경영일선에서 은퇴한 이헌조(李憲祖·68)전LG전자회장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교육자여야 한다’는 지론을 들으며 깊이 공감했다.

미국 종합금융그룹 베어스턴스의 앨런 그린버그회장(73)은 적어도 내눈엔 기업세계의 훌륭한 교육자다. 베어스턴스는 1923년 창업이래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경영성적으로 유명하다. 그린버그는 1949년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1979년부터 이 그룹을 이끌면서 임직원들에게 끊임없이 명심보감 같은 메모를 보낸다. 물론 자신이 실천의 선두에 선다.

‘자만심’은 그린버그의 어록에 자주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자만심이란 스스로 찾아오는 ‘행운이란 손님’마저도 내쫓는 아주 고약한 놈”이라 했고 “자만심이야말로 우리의 최대의 적”이라고도 했다.

그는 덧붙였다. “베어스턴스보다 더 전도유망했던 대기업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쓰러진 것도 바로 거만함, 자기도취, 자만심이라는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됐기 때문이다.”

▼現代는 大宇의 거울 외면말아야▼

김우중(金宇中)의 대우함대는 왜 침몰했으며 현대그룹은 어쩌다가 ‘우리는 대우가 아니다’고 굳이 강조하는 처지가 됐나. 정답은 모르지만 그린버그의 말이 떠오른다.

현정부 출범 전후 대우 김회장의 행보는 IMF사태에도 불구하고 거침이 없는 듯 보였다. 1997년 11월 27일 정부가 IMF에 매달려 구제금융협상을 벌이던 와중에서 김회장은 은행업 진출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金大中)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재계에선 ‘김회장이 날개를 달았다’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삼성그룹이 힘들게 됐다’는 얘기가 나돌고 실제로 삼성측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김회장이 “대우는 과거 옥포조선소 정상화 때 그룹 구조조정을 해버려 새로 할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한 것은 98년 1월이다. 그는 98년 2월 전경련 공동회장이 된 뒤에도 심심찮게 재벌개혁에 반론을 폈다. ‘김회장이 기아 인수의사를 표명했으며 인수 후의 계획까지 밝혔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한 것은 98년 3월이다. 그 무렵 김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주소로 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세계경영을 알고 싶으면 김우중의 영문이름을 두드리라’고 했다.

그 후 대우그룹은 몇차례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지만 ‘반짝 홍보’에 그쳤다. 빚을 줄이기는커녕 수십조원어치의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해 빚더미를 쌓았다.

김회장은 끝까지 정부를 믿었는지 몰라도 작년 여름 그에게 끝내 백기를 들도록 만든 것은 시장이었다. 특히 ‘세상 바뀐 줄 모르고 재벌팽창을 주도하는 인물’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것은 그의 큰 ‘실수’였다. 아무래도 김회장은 IMF사태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읽은 것 같다.

미국의 경영 신조어사전에 ‘던랩’이라는 타동사가 올라 있다. ‘전기톱’이란 별명이 붙은 기업구조조정 전문가 앨버트 던랩(63)의 이름에서 파생된 용어다. 그 뜻은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구조조정하다’ ‘최선이 아닌 것은 제거하고 최선의 것에만 집중하다’ ‘주주가치를 보호하고 높이다’ 등이다.

김회장이 IMF사태를 맞은 후에나마 ‘나는 어떤 난관도 깰 수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던랩’에 매진했더라도 지금처럼 유럽을 떠돌고 있을까.

현대는 대우와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대우사(史)에서 얻어야 할 교훈도 많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시장의 ‘IMF상황’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베어스턴스의 전설적 경영고문 하임킨켈 아나이니칼의 경구(警句)가 와닿는다. “아무리 강한 사슬도 그 중 가장 약한 고리에 의해 강도가 결정된다.”

▼정권과의 인연이 함정될 수도▼

그린버그의 이 말은 또 어떤가. “고객들은 과거에 우리가 이룬 성과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고 투자할 뿐이다.”

‘정권과 인연이 깊은 재벌’이란 것의 의미도 뒤집어 읽어봐야 한다. 그런 끈에 대한 계산이 ‘우리를 어쩌랴’라는 배짱과 자만심을 키웠다면 ‘정경(政經)의 인연’은 구원(救援)이 아니라 함정이기 쉽다. 대우의 운명과 현대의 근황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정권의 온정을 포기한 기업들이 오히려 잘 꾸려가는 걸 보면서 하임킨켈의 이 한마디도 씹어보게 된다. “상황이 고달파지면 그 고달픔이 밑천이 된다.”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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