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코리안 뷰티'

  • 입력 2000년 4월 6일 19시 38분


코멘트
레스터 버넴. 마흔 두 살의 잡지사 직원인 이 사내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다.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무시당하는 그는 ‘거세당한 듯’ 무기력하다. 그러던 그가 고교생 딸의 친구에게 한눈에 반하면서 ‘20년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그녀에 대한 성적 환상을 꿈꾸며 지겨운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꾀한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햄버거 가게에 취직한다. 아내의 차를 팔아 스포츠 카를 사고 대마초를 피운다. 딸의 친구가 원하는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 운동에 매달린다.

그의 아내는 부동산 판매여왕에 집착한다. 그녀에게 무능한 남편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성공의 이미지’에 매달리면서 잘나가는 부동산 판매업자와 불륜관계로 빠져든다. 그의 딸은 친구에게 침을 흘리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경멸한다. 성공한 삶을 위해서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어머니도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레스터의 이웃인 퇴역장교는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동성애 성향을 억누르기 위해 군인이 됐고 나치를 숭배했던 인물. 그는 자신을 억제하듯 고교생 아들에게도 ‘반듯한 삶’을 강요하지만 그의 내면은 언제나 병적으로 불안하다. 끝내 이 퇴역장교는 레스터를 동성애자로 착각하고 접근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권총으로 살해한다.

환부와 치부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주연남우상 등을 휩쓴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는 이처럼 아름다움의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겉으로는 안락해 보이는 미국 중산층 가정이 속으로는 얼마나 병들고 곪아있는지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다.

‘아메리칸 뷰티’가 미국 중산층 사회의 환부(患部)를 절개하고 있다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선후보들의 재산 납세 병역 전과 공개는 한국사회의 고위층 지도층으로 행세해온 정치인집단의 치부(恥部)를 드러내고 있다. 어느 후보는 재산신고액이 10억원을 넘지만 소득세와 재산세는 한푼도 내지 않았다. “그동안 몇 차례 선거에 출마했는데 낙선할 때마다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아예 모든 재산을 아내 명의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어느 후보는 “재산신고액 중 대부분은 재테크전문가인 아내 몫”이어서 재산세를 조금밖에 낼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이래저래 지난 3년간 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은 후보가 5명 중 1명, 재산세를 내지 않은 후보가 3명 중 1명꼴이다.

병역도 이상하다. 5명에 1명꼴로 군대에 가지 않았다. 특히 돈이 많은 후보일수록 본인과 그 자식의 병역면제율(45%)이 높다. 일반인(4.6%)의 10배에 가깝다. 자식이 병역면제된 후보를 소속정당별로 보면 한나라당이 51명, 자민련 36명, 민주당 31명, 민국당 11명, 한국신당 3명 순이다. 개인별 면제사유야 어떻든 지난 세월 힘을 누렸던 측일수록 당사자나 그 자식이 군대에 안간 것(혹은 못간 것?)을 알 수 있다. 어제부터 공개된 전과기록에는 간통, 폭행, 사기와 사문서 위조 등 파렴치범들도 수두룩하다니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다.

불로소득의 뿌리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선대상에 오른 후보들의 변명 역시 우습다. 과거 비리로 걸린 후보들은 한결같이 ‘정치적 보복’과 ‘표적사정’이었다고 강변한다. 뇌물수수 혐의에는 한 입으로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을 노래한다. 한보로부터 5000만원을 받았던 한 후보는 “한보 임원이 놓고 간 돈을 여러 차례 돌려주려 했으나 돌려줄 길이 없어 장학금으로 전액 기부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변명이나 주장을 다 거짓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치인 모두를 한 묶음으로 매도할 일도 아니다. 이 모든 불로소득(不勞所得)의 뿌리, 돈으로 권력을 사고 권력이 돈을 부풀리는 천민(賤民)자본주의적 상호 상승구조가 배태한 도덕적 불감증은 그동안 온존해온 우리 정치 사회 문화의 총체적 모습이기에 그들에게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하나 이제 이같은 ‘코리안 뷰티(Korean Beauty)’, 겉으로는 번듯하나 속으로는 파렴치한, 권력과 명예를 누릴 줄만 알았지 해야 할 의무와 도리는 외면하는 ‘정치건달’들을 언제까지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전진우(논설위원) 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