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구급차 경적-안내 무시 "내길 간다"

  •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지난달 15일 오후 부산 북구 화명동의 주공아파트 정문 앞 왕복 4차로 도로.

만성신부전증 환자 오모씨(29·여)를 인근 병원으로 후송 중이던 부산 북부소방서 화명파출소 소속 119구급차량이 마주 오던 쏘나타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차에 타고 있던 소방교 김모씨(32)를 포함한 2명의 구급대원과 오씨 일행 등 6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머리와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오씨는 일단 외상을 치료하기 위해 당초의 목적지와는 다른 인근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경광등을 울리며 달려오는 구급차량을 발견하고도 계속 과속으로 맞은편 언덕을 내려오던 승용차가 중심을 잃고 중앙선을 침범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렇게 환자를 후송 중인 구급차량의 안전까지 외면한 운전자들의 부끄러운 운전습관은 이제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되어 있다. 구급대원들은 “초를 다투는 후송과정에서 양보는 고사하고 끼어들기와 난폭운전을 일삼는 일부 운전자들로 인해 애로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6일 오후 서울 강서소방서 소속 양종현소방교(38) 등 2명의 대원은 늑막염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50대 환자를 인근 병원으로 후송 중이었다.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경광등과 경적을 무시하고 진행방향으로 끼어드는 버스 등 대형차량의 난폭운전으로 시간이 10분 이상 지체됐다. 사거리에서 일부 시내버스들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교통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구급차가 지나가기도 전에 무섭게 속도를 높여 발차하는 횡포를 일삼았다.

서울 서부소방서 북가좌소방파출소 소속 고금협(高金協·35)구조반장은 얼마 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차로를 무단횡단하다 차에 치인 초등학생을 후송하기 위해 긴급출동한 고반장 등은 사고현장을 불과 수십미터 앞두고 들것과 응급처지 장비를 든 채 차에서 내려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요란한 경적과 확성기를 통한 수차례의 안내방송에도 불구하고 사고지점 인근의 정류장으로 진입하는 버스와 택시들 때문에 도저히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 고반장은 “며칠 전 출근시간에는 위독한 고혈압 환자 후송 중 차량들이 양보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각종 사고현장에서 구급차량들이 일반 차량들의 횡포로 몸살을 앓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한 구급대원은 “자기 차선으로 진입하면 욕설을 하거나 아예 구급차량의 꽁무니를 따라오며 체증을 피하려는 ‘얌체족’을 볼 때면 맥이 빠진다”고 덧붙였다.

일반 운전자들의 ‘양보의식 부재(不在)’ 현상이 개선되지 않는 한 구급차량들은 ‘곡예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도로교통법상 구급차량이 접근할 경우 일반 차량들은 교차로에서는 일단 정지, 그 밖의 도로에서는 반드시 우측 가장자리로 서행 또는 정지토록 규정돼 있지만 규정을 지키는 운전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현장 대원들의 얘기.

이 때문에 위독한 환자를 한시바삐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구급차량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중앙선을 넘나드는 ‘모험’까지 감행해야 하는 실정.

서울 종로소방서의 한 구급대원은 “구급차량이라도 중앙선을 넘나들다 사고가 나면 일반 운전자와 똑같은 처벌을 받지만 후송이 지연될 경우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원성을 듣게 돼 하는 수 없이 곡예운전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털어놓았다.

이같은 열악한 여건을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구급차량에 대한 일반 운전자들의 ‘선 양보’뿐이라는 현장대원들의 이구동성.

서울 강남소방서 송파소방파출소 이병일구급반장(36)은 “얼마 전 응급환자 후송과정에서 한 외국인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좌우로 손을 들어 끼어드는 일반 차량들을 막아줘 무사히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며 “일반 운전자들이 후송 중인 환자가 내 가족이나 친구라는 생각으로 양보하는 배려가 아쉽다”고 말했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공석용안전개발과장은 “외국의 경우 구급차량이 지나갈 때까지 일반 운전자들이 차로를 비켜주거나 일단 정지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몸에 배어 있다”며 “구급차량에 대한 양보는 곧 그 나라의 문화수준과 직결되는 만큼 일반 운전자들의 의식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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