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세상]49년된 식당운영 권영희씨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낡은 벽에 붙은 메뉴는 단 하나. ‘우거지 얼큰탕 1500원’. 닳고닳은 나무탁자에 동그란 빨간 의자들. 10여평 남짓한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자란 듯싶으면 얼른 국물이 채워졌고 꾹꾹 눌러담은 밥에선 기름기가 흘렀다. 문 앞 가마솥에선 연신 허연 김이 새어나왔다.

이 집 주인 권영희씨(54). 화장기 파마기라곤 전혀 없는 수수한 얼굴에 낡은 잠바, 허리에 두른 해진 전대가 세월의 더께를 말해준다.

“아이고, 우리 집은 뭐 소개할 것도 없는데….”

▼70년엔 700원…代이어 싼값▼

―인심좋은 식당이라고들 하던데…. 단골이 많나봐요.

“이 가게가 내년이면 50년이오. 시어머니 때부터 했지. 우리집 단골들은 10년, 20년씩 됐어.”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 피곤하지 않나요.

“설과 추석 때 이틀씩 쉬는 것말고는 30년을 그렇게 일했는데 뭐. 힘들 때는 그저 내 인내력을 시험하는 거겠거니 해요. 하하하.”

―한 그릇에 1500원 받고 장사가 되나요.

“1·4후퇴 때 피란와 허허벌판에 식당 낸 시어머니 고집이에요. 내가 시집온 70년대엔 700원 했으니 30년 동안 800원 올린 셈이죠. 이래 갖고는 안된다고 시어머니한테 투정도 부렸죠. 어머니는 ‘욕심내지 말아라. 다 자식들한테 복 돼서 돌아온다’ 하시더라고. 돌아가신 뒤에도 그 말씀이 생각나 밥값을 올릴 수가 있어야지. 1000원에서 1500원으로는 5년 전 내가 올린 건데 ‘생병’을 앓았어요. 손님들한테 어찌나 미안하던지 잠을 못 잤어.”

―어떤 손님들이 주로 오나요.

“배고픈 사람들이지 뭐(웃음). 거지 술주정뱅이에서부터 공무원 샐러리맨 사장님까지 다양해요. 70년대초엔 넥타이 부대들이 많았는데 80년대 오니까 리어카행상, 날품팔이 일꾼들이 많더라고. 탑골공원 할아버지 할머니 단골도 생겼고. 여기 낙원상가는 밤무대 악사들 본거지잖아요. 기타 둘러메고 색소폰 끼고 후루룩 먹고 가던 사람들이 노래방 때문에 일자리 없어지니까 안 보이더라고. 요즘엔 택시기사들이 많아요. 싸고 맛있다고 소문이 났는지 가끔 외국사람들도 오고.”

―손님들마다 사연이 많겠군요.

“내가 반(半)관상쟁이 다 됐다고. 사람마다 다 자기 그릇이 있는 거야. 욕심이 많으면 자기 그릇을 못 본다고. 그러니까 실수를 하지. 그래도 사람한테는 ‘사랑’만큼 큰 약이 없어.”

―기억에 남는 사람 있으세요.

“(약간 뜸을 들인 뒤) 김씨라고, 50 넘어 식구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 있었지. 맨날 술먹고 길거리에서 자길래 우리 식당서 먹이고 재우고 했어요. 어느 날부턴가 막일해 돈 벌었다고 박카스도 사오고 과일도 사오더라고. 이제 사람되나 했더니 갑자기 사라졌어. 한달 뒤 경찰이 왔는데 거리에서 동사했대요. 주머니에 우리집 전화번호 적어놓고 죽으면 나한테 연락하라는 메모가 있었대나. 어찌 눈물이 나던지….”

▼"요즘 젊은이 거품 많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때요.

“거품이 많아. 우리집 단골 택시기사 한사람이 아파트 분양받아 좋다고 하더니 한달쯤 뒤에 대뜸 집 담보잡고 은행돈 빌려 사업을 하겠대. 6개월 뒤에 다시 왔어. 다 들어먹고 다시 영업용 택시 몬다고. 만족을 모르면 억만장자가 무슨 소용 있겠어.”

훌쩍 점심시간이 다 됐다. 사람들이 문 밖까지 줄을 잇고 있었다. 더 이상 ‘가마솥 앞 대화’로 장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국 한그릇 먹고 가라’는 권씨를 뒤로하고 나왔다. 인정이 넘치는 우거지집의 따뜻한 온기 덕분에 기자는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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