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증오' 사회를 병들게 하는 '毒'…관용이 '藥'

  • 입력 2000년 2월 28일 00시 48분


나는 3년 전 존 윌리엄 킹이 제임스 비어드 2세를 픽업 트럭 뒤에 매달고 약 5km를 달려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킹의 머리 속에는 과연 무슨 생각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킹이 친구들과 함께 비어드를 그렇게 죽인 것은 비어드가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킹은 법정에서도 비어드의 가족에게 뭔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자 그들을 향해 히죽히죽 웃으면서 상스러운 말을 해댔다.

킹의 증오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까. 상대방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혹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이 폭력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증오라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 증오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은 또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형법에 ‘증오 범죄’라는 새로운 죄목을 추가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99년 8월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증오’가 미국 땅에 독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도 증오 범죄를 강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전국 대중매체 데이터 베이스인 넥시스를 검색한 결과 1985년에 증오 범죄가 11건이었다. 그런데 1990년까지 검색 범위를 넓히면 이 숫자는 1000건 이상으로 늘어난다. 1999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증오 범죄를 언급한 기사는 7000건이었다.

그러나 증오의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증오는 편견, 완고함, 선입견, 분노, 타인에 대한 혐오감 등을 모두 합한 개념인가.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의미하는가. 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돈키호테만큼이나 무모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행동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합리적인 이성" 명분속 깊숙히 도사린 편견▼

증오는 어디에나 있다. 인간은 항상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일반화해버린다. 진화과정에서 친구와 적이 누구인지 미리 아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애국자들 중에서 외국인에 대해 한번도 혐오감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론 증오는 편견보다 더 심각하고 어둡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증오와 편견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 거의 악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어떤 차가 얌체처럼 자신의 차를 추월해버리면, 우리는 그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나 흑인일 경우 금방 증오한다. 그리고 밤길을 걷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주위를 둘러보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흑인 남자가 아니라 백인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금방 안도감을 느낀다.

잡지 머큐리의 편집장이었던 H L 멩켄은 지칠 줄 모르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는 “대화를 통해 분별력이나 판단력 비슷한 것을 흑인 여자의 머리 속에 넣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흑인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유치하며, 직접 경험을 하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자신의 일기에 썼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상대의 인종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동했으며, 인종차별을 폐지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잡지에 많은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실었고, 그들을 위해 잡지의 발행인인 알프레드 크노프를 상대로 로비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선구적인 흑인 작가 및 언론인들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증오에 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멩켄은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선입관 협오감 분노 억압된 감정에서 싹터▼

옛날에는 증오를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사르트르는 1946년에 에세이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을 썼을 때 반유대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증오의 종류가 사랑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공포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경멸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증오가 있는가 하면 권력이 없기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다. 또 복수심에서 생겨난 증오가 있는가 하면 부러움이 변해서 증오가 된 것도 있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증오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현대적인 단어들, 즉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자 혐오증 같은 단어들은 사실 증오의 다양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이 단어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증오의 대상인 희생자들의 신분뿐이다. 이 단어들만 가지고는 가해자의 신분과 생각을 알 길이 없다. 이 단어들은 심지어 희생자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그 이후의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론에서 나온 말인 무슨 무슨 ‘주의’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묘사하기보다는 권력구조를 묘사하는 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치 구조가 뭔가를 느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조적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증오’는 그냥 단순한 명사일 뿐 증오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단어가 현실화돼서 누군가가 실제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변하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우리는 증오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이 매번 매우 다르며 때로는 이들을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지 않아야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는, 정당한 증오와 부당한 증오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예로 들어보자. 르완다에서 80만명의 투치족이 후투족 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투치족은 이에 대한 복수로 수천명의 후투족을 죽였다. 이 경우 애당초 종족말살을 획책한 가해자의 증오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 끔찍한 증오를 이기고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오는 정당화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증오 외에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심리 치료사인 엘리자베스 영-브뢸은 자신의 책 ‘편견의 해부학’에서 증오를 세 가지로 구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강박적인 증오는 나치의 경우처럼 소수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환상 때문에 소수를 제거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증오하는 집단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대상을 더러운 것, 혹은 병든 것으로 보고 그들을 ‘정화’하거나 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이다.

두번째로 히스테리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과 좀 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브뢸은 히스테리컬한 편견을 가리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금지된 성적 욕망과 성적으로 공격적인 욕망을 실현해줄 사람으로 한 집단을 지명할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편견이라고 설명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 중 일부가 이 설명에 들어맞는다. 흑인을 증오하는 백인 중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적인 선망과 신체적인 선망 때문에 증오심을 품게 된 사람들이 있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는 흑인을 대상으로 자신이 갈망하면서도 혐오하고 있는 성적인 자유와 육체적인 힘 등을 이상화한다. 그의 공상은 전혀 현실적 근거가 없을지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의 증오는 일종의 ‘애증’이며 이것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미국의 남부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인도에서 성행하던 인종차별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번째로 자기애적인 증오는 성차별주의이다. 영-브뢸의 설명에 의하면 성차별주의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그냥 무시당하거나 아예 평등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은근히 친절한 척하는 남성들의 행동에는 대부분 억압되고 승화된 성적인 욕망이 섞여 있다.

물론 사람들 각자가 품고 있는 증오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성차별주의자 중에도 여성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성을 증오하는 히스테리컬한 성차별주의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애적인 성차별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역시 강박적인 동시에 히스테리컬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차별주의니 인종차별주의니 하는 말들은 인간의 충동을 1차원적인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조잡한 시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단어들의 뒤에 숨어 있는 이론들은 모든 것을 가해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흔히 가해자로 인식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예를 들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순전히 피부색과 성적인 취향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증오를 설명하기 위한 조잡한 접근방법이 증오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증오의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경우 많아▼

무슨무슨 주의에 입각해서 증오로 인한 현상을 보는 대신 이를 인간 각자의 심리적인 반응으로 보기 시작하면 증오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증오 범죄에 관한 미 연방수사국(FBI) 통계에 나타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1990년대에 미국에서는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흑인의 숫자가 백인의 숫자보다 세배나 많았다. 아내를 때리는 남성들 중에 어렸을 때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은 것처럼,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증오의 피해자들이 증오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외당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분노가 쌓인 결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은 오히려 증오의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이미 증오의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해자에게 느끼는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기분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법 앞에서 더욱 수상쩍은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근절시킬수 없는 '사회의 그림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증오 범죄가 다른 범죄에 비해 더욱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는 실제로 피해를 본 피해자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증오 범죄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증오와 공포를 퍼뜨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에 공포와 놀라움을 퍼뜨리는 것은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교회나 학교에 들어가서 무작정 총을 쏘아대는 범죄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겨냥한 범죄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런 범죄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공포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집단에 대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가 개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보다 더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를 죽이는 것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흑인이나 동성애자를 죽이는 것 중, 어느 편에 더 많은 증오가 담겨 있을까.

점점 다양해지는 문화 속에서 증오를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로운 국가에는 언제나 증오가 존재한다. 게다가 증오와 편견의 표현은 때로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오히려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증오를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증오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증오를 초월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해자는 그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입힐 도리가 없다. 인종차별적인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은 그가 상대의 말을 자신의 인생과 인격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증오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home/19990926mag-hate-ess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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