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어떤 쓸쓸한 정치적 풍경

  • 입력 2000년 2월 22일 19시 03분


정말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이었다. 어쩌면 ‘친구들’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모임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려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건너뛴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 ‘친구들’을 이어주는 마음의 끈은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전두환 일파의 정권찬탈 음모에 항의하기 위해 벌였던 서울역 시위다. 우리는 이 시위를 모의한 회의에서 서로를 알았다. 그 다음에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취조실과 군법회의 재판정, 그리고 교도소에서 피멍든 얼굴로 스치듯 눈길을 나누었을 뿐이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교도소에서 곧장 군대로 보내졌기 때문에 다시 보지 못한 친구들은 얼굴도 이름도 잊고 살았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무릎을 맞대고 저녁을 먹으면서 80년대에 ‘별’을 두 개나 다느라 번듯한 직업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한 친구가 말한다. “참혹하게 뭉개져버린 내 청춘을 돌려 받고 싶다. ‘386 의장님’들은 정치권에서 상한가를 치는데 우리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의료보험조합에 근무하는 다른 친구가 자조(自嘲) 섞인 말투로 되받는다. “5·18 피해자 신고기간이 2월말까지로 연장되었으니 돈으로 돌려받으면 될 테지.” 조그만 환경전문지 기자로 있는 또 다른 친구가 거든다. “징역 한 달 보상금이 당시 일용직 노임 기준으로 25만원쯤 된다는구먼.” 나는 말했다. “그것도 국방부로 법무부로 뛰어다니면서 서류를 떼서 자기가 사실관계를 입증해야 한다니까 앓느니 죽는 편이 낫지 뭐하러 그 짓을 해?” 이 문제는 “아버지는 그때 뭘 했느냐”고 묻는 중학생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보상 신청을 하겠노라는 한 친구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4·19세대와 6·3세대, 민청학련 세대와 386세대처럼 우리도 무언가 모임을 만들고 이름을 내걸자는 한 친구의 제안을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4월혁명의 정신을 정치적 출세의 도구로 써먹은 자칭 4·19세대의 추태를 본받기는 싫어.” “6·3세대와 민청학련 세대라고 뭐가 다르지? 자기 당의 총재가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밀실에서 멋대로 공천을 하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 아닌가. ‘전하, 불가하옵니다’ 하면서 상소 올리고 사약을 받았던 조선시대 선비들만도 못하다고.” “386들은 어떤데? 지도자 행세하던 ‘의장님’들, 권력의 맛을 너무 일찍 알아서 그런지 민주화운동 선배들을 헌 신짝 취급하는 권력자들한테 잘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

부산에서 목사로 일하는 친구는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고, 내 머릿속에는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흘러갔다. 혁명이 좌절된 후 4·19세대 지식인들은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386시인 최영미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했는데, 실세들 앞에 절묘한 줄서기를 해서 ‘좋은 지역구’를 따낸 386 정치신인들을 보면 정말 그들의 잔치가 끝나긴 끝난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잔치를 벌여본 적이 없기에 누구도 홀로 남아 상을 치울 필요가 없었고 못다 부른 노래를 고쳐 부를 이유 또한 없었다.

우리는 이제 잔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합수부 동창생’들 가운데는 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청계천 헌책 노점상에서 장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일산 신도시에서 제법 큰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는 친구가 있다. 4월 하순 낮시간에 여기서 ‘합수부 총동창회’를 여는 것이다. 80년 봄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 계엄포고령 위반 구속자, 감옥 대신 군대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지난날의 꿈’을 잊지 않은 이들이 모여 ‘뭉개져버린 청춘’을 스스로 위로하자는 것이다. 정치적 결사는 절대 만들지 않는다. 한번 놀아보지도 못하고 보낸 청춘이 하도 억울해서 여는 뒤풀이 잔치일 뿐이다.

칼럼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독자들께 죄송하지만 나는 수없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이 세상 한구석에 이렇게 조금은 쓸쓸한 풍경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여기서 무엇을 느끼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너무 크게 나무라지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유시민 <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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