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수산/동아국제마라톤을 기다리며

  • 입력 2000년 2월 9일 20시 01분


그때 어느 날, 강변도로가 생기며 우리는 한강을 잃었다. 한강변에 생겨난 강변도로가 사람들이 강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을 때, 겨울철새는 잊지 않고 찾아들지만 한강은 사람이 없는 강이 되었다. 오염수치가 아니다. 사람이 가지 않는 강, 그것이 죽은 강이다.

▼서울의 길이 사람의 길로…▼

그랬다. 사람이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한강을 잃었다. 물놀이를 가고 황포돛배가 떠가던, 광나루도 마포도 잃었다.

그래도 한강둔치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대로에 통로를 만들고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게 숨통을 터 주면서였다. 유람선이 뜨고, 야외수영장이 생기고, 불꽃놀이를 즐기며 가족들이 산책을 나왔을 때 비로소 한강은 우리에게 돌아왔다. 사람이 있는 강으로.

광화문에서 출발한 ‘인간의 물결’이 종로를 지나 군자교를 건너고, 자양로를 거쳐 학여울 역을 휘돌아, 피니시라인이 있는 잠실로 흐른다고 한다. 다가오는 동아서울국제마라톤, 3월 19일의 일이다. 이 감격스러운 모습을 그리며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한강에 이어 ‘서울의 길’이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의 길’이 되어 돌아온다는 감격이 있기 때문이다.

길의 주인은 사람이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통로의 원형질이었다. 그 서울의 길이 자동차의 길이 되고, 매연과 체증으로 뒤엉키는 속도의 길, 상업의 길, 죽음의 길이 되었다. 욕망의 각축장으로 변한 것이다. 사람이 가지 않는 강이 죽은 강이었듯이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은 죽은 길일지도 모른다.

이제 서울의 길이 사람에게로 돌아온다고 한다. 얼마나 장엄한가. 그때 서울의 길은 이미 ‘동아서울국제마라톤’이 달리는 길이 아니다. ‘동아서울국제마라톤’이 달리는 ‘사람의 길’이 된다.

런던이나 뉴욕 로테르담 마라톤은 3만∼4만명의 인간이 출렁이는 도시의 축제가 되어 세계의 이목을 모은 지 오래다. 우리 선수들도 그 거리를 달렸다. 시민들은 흔쾌히 이 하루 동안의 ‘길의 재생’에 동참한다.

생각해 보면 서울 도심의 길을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걸어본 것이 언제인가.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전부는 아니었던가. 그리고 언제 서울의 길 위에 섰던가. 다난한 역사의 구비마다에서 소리치고 피 흘리고 눈물을 쏟아가며 이 길 위에 섰었다. 4·19의 물결 속에서, 80년 민주화를 외치던 ‘서울의 봄’에, “종철아, 아비는 할 말이 없데이”하는 아버지의 한마디가 온 국민의 멍든 가슴을 대변하던 박종철군의 유해를 뒤따르며, 6월항쟁의 노도 속에서…그렇게 우리는 겨우 이 서울의 길 위에 서 보았을 뿐이 아니던가.

광화문 광장에 운집할 참가선수를 상상한다. 종로통을 들썩이며 내달릴 그 인간의 파도를 생각한다. 이날 하루만은 교통체증에 찌들던 가슴을 열고 바로 그 거리를 우리들의 두 발로 딛고 서자.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이 길을 달려보자. 비로소 서울의 길이 ‘사람의 길’로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코스 최적 세계新 작성 기대▼

더욱 기다려지는 것은 세계최고기록에의 갈망이다. 해발 29.7m 광화문을 출발하여 15.3m인 잠실까지는 표고차가 15m를 넘지 않는 마라톤 최적의 코스이기 때문이다. 높낮이는 평탄하고, 길목마다 아기자기하다. 슈베르트의 소나타 ‘노랫말 없는 노래(song without word)’의 어느 한 곡처럼.

출발시간 오전 10시의 평년기온은 영상 7도 안팎이다. 여기에 선수들은 뒷바람을 등에 맞으며 뛰게 된다. 이 최적의 코스에, 말 그대로 세계 최강의 선수들이 새천년의 기록에 도전한다. 2시간 6분대의 키프로프,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의 아벨 안톤 등 군웅이 일구어낼 세계최고기록에의 예감은 육상팬들에게는 벌써부터 즐거움이다. 한국마라톤의 기대주 김이용에게 거는 기대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흔히 우리는 ‘도(道)를 닦는다’고 한다. 왜 인격의 수련을 길이라고 표현하는가. 서울의 길을 달릴 동아국제마라톤에서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한수산(소설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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