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비자 파워]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권리

  • 입력 2000년 2월 1일 08시 27분


노총각인 독일인 P(34)는 98년12월 베를린에 있는 A결혼상담소를 찾았다. 상담소측은 P의 마음에 드는 상대방이 나타날 때까지 6개월 동안 10명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그는 소개료 명목으로 회비 700마르크(약 44만원)를 지불했다.

P는 다음달부터 매달 2, 3명을 소개받았지만 한번도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 상담소에서 소개시켜준 파트너들은 당초 약속과 달랐다. 외모나 학력 등이 기대에 못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이혼녀가 나온 경우도 있었다.

P는 베를린 소비자센터(Vebraucher-Zentrale)를 찾았다. 소비자센터는 “결함이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으므로 회비를 돌려주라”고 권고했고 P는 상담소로부터 500마르크를 돌려받았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사는 G부부는 98년 여행사를 통해 크레타 섬으로 휴가를 갔다. G부부가 예약된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은 지진의 여파로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여행사는 인근 호텔로 옮겨줬으나 호텔은 아주 지저분했고 뜨거운 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G부부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 제소했고, 뒤셀도르프 법원은 G부부의 휴가기간이 쓸모없이 소비됐다며 여행사에 손해배상을 해주도록 판결했다.

재미있는 것은 부인이 받은 손해배상액이 남편에 비해 훨씬 많았다는 점. 남편은 889마르크를, 부인은 1100마르크를 각각 받았다.

남편이 집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휴가로서의 가치가 어느 정도 있었던 반면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부인이 집에 있는 것은 휴가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100%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이다.

이 같은 사례가 보여주듯 소비자의 권리는 상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행 금융 의료 법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부문으로 대폭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서비스에서도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은 민법에 여행 소비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명문화하고 있다. 여행 서비스에 중대한 흠이 있고 그 책임이 여행사에 있을 경우 여행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

여행사가 파산했을 경우에 대비한 소비자 보호방안도 강구하고 있다. 94년 신설된 독일 민법 제651조 K항은 여행업자는 보험사와 보험계약을 하거나 은행 등 금융기관의 지불보증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행사의 파산으로 여행 소비자가 여행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됐을 때 소비자에게 여행비 등의 비용을 돌려주도록 담보하기 위해서다.

시장의 다양한 상품을 검사해서 정확한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독일 상품시험검사소(Stiftung Warentest)의 업무 중에서도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커졌다. 이 검사소의 하이케 반 라크 대변인은 “검사소에서는 매년 120건 정도의 테스트를 하는데 그중 서비스 상품의 비중이 70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금융상품의 경우 소비자들의 관심은 큰 반면 전문적이고 복잡해 소비자 정보제공의 필요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전문가들이 고객을 가장해 직접 금융기관을 방문, 그 내용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한다. 그리고 관련정보는 90년 창간돼 금융상품 정보만을 제공하는 잡지(Finanz Test)에 고스란히 소개된다. 이 잡지는 매달 32만부씩 발행된다.

이밖에 상품시험검사소는 공공서비스에 해당하는 우편업무의 신속성과 정확성을 파악하기 위해 집배원의 이동경로를 고스란히 답사하는 등 현장확인을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시에 있는 헤센주 소비자센터(Verbraucher-Zentrale Hessen)의 콘라트 친도르프 이사는 “여행과 보험 항공 금융 등 서비스상품과 관련된 소비자들의 민원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는 특히 의료부문에서의 소비자보호가 철저하다. 의료부문의 소비자보호 정도는 진료나 치료 도중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의 배상 문제로 판가름난다.

의료사고 가운데 상당수는 소송으로 번지게 마련. 환자와 의사 가운데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지는 어차피 정확히 가려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 판례는 의사나 병원에 비해 의료지식이 극히 미약할 수밖에 없는 환자에게 소송상 대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입증책임을 전환시키는 예외를 발전시켜 왔다. 환자가 의사의 과실과 의료사고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자신의 과오가 의료사고 발생의 원인이 아니었음을 입증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진료기록이 존재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게 작성된 경우에는 입증방해가 성립될 수 있다고 봐서 의사나 병원의 책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B산모는 97년9월 산통(産痛)을 느껴 병원으로 급히 갔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이상해지자 의사는 흡입기로 태아를 끄집어냈다. 태아는 어깨 한쪽이 한동안 모체에 붙어 있었고 그 사이 산모의 뼈에 눌려 한쪽 팔 일부가 마비됐다.

그러나 태아의 출산과정에 대한 기록에는 의사가 어깨 한쪽이 모체에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는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 지방법원은 “진료기록상의 하자(瑕疵)는 의사가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확한 의료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며 6만5000마르크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독일에서는 정부와 관공서의 공공서비스 사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견제도 이뤄지고 있다.

98년10월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의 겔젠키르헨시에서는 매년 450만 마르크의 적자운영에 허덕이는 동물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시의회는 대표를 선발해 미국 올랜도의 디즈니월드 등 동물원 3곳을 견학한 뒤 보수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시의회 의원 등 20여명이 선발됐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인 납세자연맹 소속회원들은 ‘예산낭비’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기민당(CDU)소속 시의원 등 일부는 자발적으로 여행계획을 취소했고 결국 견학단은 필요한 최소인원인 5명으로 최종 결정됐다.

독일 최대의 법률회사인 브룩하우스에 소속된 한국인 정하성 변호사는 “의료사고와 법률분쟁 등에 대한 독일 법원의 판례는 소비자인 환자와 당사자에 대한 보호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 인터뷰/獨 상품시험검사소 반 라크 대변인 ▼

독일 상품시험검사소(Stiftung Waren-test)는 64년 독일정부가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상품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법인으로 유럽을 통틀어 가장 권위있는 상품검사소다. 이곳에서 발간되는 월간지 ‘TEST’와 ‘FINANZ TEST’는 ‘소비자의 바이블’로 통한다.

검사소의 하이케 반 라크 대변인은 지난해말 본보 기자가 방문하자 “한국언론인을 만나기는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

―서비스 부문의 소비자 권리가 더욱 중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당연하다. 3차 산업의 신장에 비례해 서비스 부문의 소비자보호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는 69년부터 서비스상품 검사를 실시해 왔으며 지금은 전체 검사의 50%를 넘는다.”

―서비스상품 검사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일반 제품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소비자의 판단이 쉽지 않고 따라서 권리 침해가 심각할 수 있다. 서비스 검사는 철저하게 현장위주로 이뤄진다. 예컨대 얼마 전 전국 주요병원을 대상으로 서비스실태를 조사했는데 각 병원 의사들을 일일이 찾아가 ‘당신이 아파서 병원을 찾는다면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가겠는가’라는 식으로 면접조사했다.”

반 라크 대변인은 “검사소는 설립 당시 100% 정부보조를 받았으나 지금은 자체 수익금으로 예산의 90%를 해결한다고 밝혔다.

그는 “검사소는 테스트 샘플을 절대로 기증받지 않고 소비자로 가장해 직접 구입하며 테스트를 의뢰할 때도 제품을 식별할 수 없도록 내용물만 전달한다”며 “독일 국민의 3분의 1이 제품 구입시 검사소의 테스트결과를 참고한다”고 말했다.

반 라크 대변인은 요즘 상품시험검사소의 활동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건강문제나 인터넷 등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 한국은 ▼

여행과 보험 금융 의료 법률 등 서비스부문에 대한 국내의 소비자 보호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여행의 경우 여행사업자와의 관계를 정하는 여행약관은 요금의 전부를 여행시작 전까지 선불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환불절차는 아주 까다롭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은 여행서비스가 불만족스러워도 그대로 감수하거나 사후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일 같은 여행자 보호규정이나 판례가 없기 때문에 사후 피해구제도 부실하다.

또 여행사가 여행시작 전 또는 여행 도중에 파산한 경우에도 대책이 전혀 없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여행사 도산사태가 속출했을 때 여행 소비자들은 원금도 못 찾고 피해를 보았다.

영국과 벨기에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여행사의 설립을 우리의 등록제보다 훨씬 엄격한 허가제로 하고 있어 부실여행사의 난립을 사전에 막고 있다.

의료와 법률 부문에서도 외국은 소비자보호단체의 개입과 보호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99년4월에야 소비자보호법원법이 개정돼 의료 및 법률 부문의 소비자상담이 가능해졌다.

그밖의 의료 및 법률 분쟁을 전담하는 소비자 보호단체나 기구는 거의 없다.

의료과실 소송에서도 판례는 독일의 ‘입증책임 전환’ 등의 이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의사의 과실과 의료사고 발생 사이에 ‘개연성이 있으면 의사쪽의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판례가 바뀌어 상대적으로 환자보호가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법률부분의 소비자 보호도 사각지대다. 소송의뢰인이 법률서비스가 불만족스럽더라도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에게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해 다투는 것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게다가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꺼릴 것은 당연한 일. 법조인들은 독일과 같은 법무보험 제도의 도입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지적한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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