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시민운동, 잘 나갈때 조심해야

  • 입력 2000년 1월 28일 19시 01분


역사적으로 보아 불리한 일을 당한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이 대응하는 유형에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메아 쿨파(mea culpa)’론, 즉 ‘내 탓이로소이다’론이다. 다른 하나는 ‘배드 보이(bad boy)’론이다. “저 못된 X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찾아낸’, 심지어는 ‘만들어낸’ ‘나쁜 아이’에게 책임을 돌린다. 첫째 유형의 최근 사례가 러시아 전대통령 옐친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옐친과 그 주변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리했다. 온갖 부정부패 추문으로 퇴임 이후 옐친은 망명해야 하고 측근들은 구속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메아 쿨파’에서 활로를 찾았다. 새 세기, 새 밀레니엄의 개시 직전인 지난 연말 전격 사퇴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퇴장의 미학’은 흔하지 않다. 우리의 집권세력은 위기에 처하면 ‘빨갱이 조직’을 조작해내기까지 하면서 분위기를 역전시키고자 했다. 75년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 사례이다.

시민운동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으로 불리한 입장에 빠진 정치인들과 정치집단들의 대응을 보면 대체로 둘째 유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들에게는 바로 시민운동단체들이 ‘배드 보이’이고, ‘나쁜 아이’들을 조종하는 배후가 집권세력 내부의 시민운동가 출신이며, 어쩌면 이들은 ‘좌익’일지 모른다. 이 ‘혁신세력’이 ‘보수세력’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음모’에서 오늘날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다고 그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보수세력을 자처하는 그들이 글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보수세력인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시민운동가들의 주장이 국민 사이에 상당히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정치판이 크게 바뀌어야겠다는 요구, 특히 부정부패하거나 불성실한 정치인들의 퇴출을 정치권 자율에 맡겨야 실현 불가능이므로 시민운동가들이 나서야겠다는 여론이 대세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오랫동안 미뤄져 왔던 정치개혁의 주도권은 확실히 시민운동권으로 넘어갔다. 시민운동단체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어느 사람, 어느 조직에나 잘 나갈 때가 방심에 빠져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때이다. 시계추가 지금은 시민운동권으로 와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거기서 멀어질 수 있다. 첫째,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 없이 시민운동의 생명은 도덕적 우위에 있다. 오늘날까지는 시민운동가들의 도덕성이 대다수 국민 사이에 인정되고 있지만, 낙천낙선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이제까지는 가려진 흠이 드러날 수 있다.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또는 퇴출 대상이어야 할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에 가담하거나 그 깃발을 들어 국민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일이 잦아지는 경우 시민운동은 시련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시민운동단체들 쪽에서 구성원들의 경력을, 자신들의 과거를 스스로 점검하고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자신들이 비판하는 대상의 선정에서 객관성과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의 국민 사이에는 여러 가지 귀엣말이 오가고 있다. 똑같은 사례에서도 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빠졌으며, 운동권 출신 본인이나 그 집안 사람이 입후보할 예정인 곳에서는 현역의원이 반드시 포함됐다고 설왕설래된다. 이러한 항설이 사실로 입증되면 ‘네임 콜링(딱지붙이기)의 정치’는 순수성을 의심받게 된다.

셋째, 국민의 박수에 들떠 독선과 자만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신만이 정의의 사도라는 착각 아래 남의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국민의 마음은 떠날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초법적 언동을 자제하며 한계를 뛰어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중의 힘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일부의 비판을 가라앉힐 수 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시민운동권에 남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운동이 정치권개편운동과 시민운동가들의 정치권 진입의 편법으로 쓰였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받게 될 것이다. 이제는 국민이 시민운동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해야 할 때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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