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30)

  • 입력 2000년 1월 21일 20시 12분


누이는 감쌌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뭔가 털어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나서 긴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네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말하더군요.

지난 주 금요일에 연락을 받았어요. 어제까지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지요. 우리는 오빠 짐을 정리하려고 베를린에 온 거예요.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쩐지 아무 일 없이 잘 흘러가더니, 내 그럴줄 알았어. 희미한 냉소가 턱 밑에서 번져와 입술 끝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언제… 어떻게요?

출장을 간 첫날이래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어요. 같이 간 분은 중상이에요. 그이를 만났더니 한윤희씨 얘기를 해주었어요. 어제부터 계속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되서 오늘 이렇게 불쑥 찾아 왔죠.

나는 누이의 냉정하고 침착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이 눈물이 솟아나더니 광대뼈 위로 한 두 줄기 주루룩 흘러내렸습니다.

나중에 마틴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지요. 베를린을 벗어날 때부터 눈발이 날렸는데 도로는 괜찮은 편이었대요. 군데군데 빙판이 있었고 프랑크푸르트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눈이 계속 내려서 차가 제법 밀려 있었어요. 하나우 부근 아우토반 교차로에서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컨테이너 화물차가 중앙 분리대에 부딪치면서 뒤집혔어요. 떨어져 나간 컨테이너가 거대한 철벽처럼 도로를 가로막으며 미끄러져 왔고 연쇄충돌이 일어났지요. 차가 다섯 대나 부서지고 사람이 여러 명 죽었어요. 마틴도 정신을 잃었고 구급차가 달려와 찌그러진 운전석과 그 옆자리에서 두 사람을 간신히 꺼냈어요. 나는 몇 개월이나 지난 뒤에도 마틴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은 끝내 묻지 못했습니다.

나는 뺨이 젖은채로 이 선생의 누이를 똑바로 쳐다 보았어요.

그인… 지금 어딨죠?

어제 입관을 시켜서 공항으로… 실례지만, 괜찮으시다면 오빠 방으로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어머니께서 한숨도 주무시질 못해서요. 거기 가서 좀 쉬고 내일 짐을 정리하구 돌아가야 해요.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세요. 열쇠는 저한테 있어요.

늘 걷던 폭스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두 여자는 나를 놓칠세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따라 왔어요. 그날도 매섭도록 추웠죠. 공원의 가로등이 새파랗게 얼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 선생 방의 창문은 불이 꺼져 캄캄했지요. 그는 이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서로 전화를 하고나서 그가 근처의 선술집이나 공원 산책로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날에도 나는 저처럼 캄캄한 창문을 다정한 느낌으로 올려다 보았지요. 아니면 그가 잠들었을 때 현관의 인터폰을 누르고나면 한참 뒤에 잠에서 깨어난 그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불이 켜지는 거예요.

방안에 들어서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고 내가 너무나 잘 알고있는 그의 물건들이 한 눈에 다 보였어요. 나는 겸손하게 문 옆에 서서 그이의 어머니와 누이가 방안을 한바퀴 돌아 그의 손길이 남은 물건들을 바라보고 만져보고 들어보고 하는 사이를 참고 기다렸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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