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임상원/유권자부터 변해야 한다

  • 입력 2000년 1월 21일 02시 36분


▼시민운동 성공 장담못해▼

우리는 악마를 천사로 만들 수 있다. 아니 최소한 악마라 하더라도 적어도 일정기간 천사처럼 행동하게끔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약속한 이론이고 꿈이다. 국민의 대표는 당연히 유권자의 현명한 판단에 의해 천사가 뽑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혹 악마가 뽑힐지라도 천사같이 행동하고 정부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악마를 묶어두는 방법이 마련됐다. 그것이 공약이고 그리고 공약이행을 감시하는 장치이다. 입후보 당시 천사의 약속을 받아내고 그가 당선되면 악마든 천사든 관계없이 대표로서 일하는 동안 천사처럼 행동하도록 감시하고 구속하는 방법이 그런 장치이다. 민주주의란 이런 유권자의 숙고와 후보자의 약속의 제도이다.

지금 하나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낙천 낙선 시민불복종운동과 같은 것은 우리 최근세사에서 아마 첫 경험이다.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시민단체의 이러한 도전이 과연 정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아직 불분명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시대가 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사태로 제일 놀란 사람들은 기성정치인들일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유독 정치인들만은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라고 생각된다.

소수와 다수로 나누어지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와 낙관은 혼재한다. 이번 시민운동이 영국식 명예혁명이 돼 또 하나의 6월 시민항쟁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있다면 비록 소수지만 중국의 문화혁명을 떠올리면서 깊은 우려를 하는 견해도 있다. 어떤 것이 맞는 답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현재의 사건은 그것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 속의 사건과는 다르다.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이를 되돌아봄으로써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이란 이렇게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은 할 수 있다. 의지를 갖고 그리고 제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지성에 의지하면서 노력은 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시민단체들의 낙천 낙선운동 결과는 유권자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 시민혁명이 될 것인지 또 혁명이라 하더라도 명예로운 것이 될 것인지, 그리고 일부가 우려하는 것처럼 혼란만을 야기할 것인지, 혹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은 유권자에게 달려 있다.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것, 바꿔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불신과 냉소주의를 벗어나 선거에 관심을 갖고 숙고하고 판단하며 또 실천하느냐 하는 것은 유권자이다. 단순히 “바꿔 바꿔”하고 소리만 지르다가 정작 선거에 임해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시민운동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 굴절된 역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정직한 정치인들을 국회에 얼마나 못 들어가게 하느냐 하는 데 달렸다. 정치인의 개인적인 자질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왜곡된 정치구조와 문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의식갖고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이제 유권자가 변해야 한다. 그저 타의에 의한 수동적인 변화가 아니라 의식을 갖고 자율적으로 숙고하고 결단하는 유권자로 변해야 한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번 시민운동을 명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그 의미를 충실하게 알고 또 느껴야 한다. 확실한 이해와 믿음을 갖고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공이든 실패든 몇몇 시민운동가들이 시민들에게 그저 선물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시민 모두가 쟁취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유롭고 공개적이며 정직한 토론이 필수적이다. 이번 운동은 지금으로서는 정치적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이 핵심이다. 물론 그 이상일 수 있다. 앞으로 더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정치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려가고 있다.

임상원(고려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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