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바둑계 뒤흔든 '루이돌풍'…이창호 9단에 불계승

  • 입력 2000년 1월 10일 20시 07분


2000년 바둑계의 첫 ‘뉴스 메이커’는 ‘반상의 여제(女帝)’로 불리는 한국 기원 소속의 중국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다.

지난해 33승6패(84.62%)로 국내 승률 1위를 차지하며 이창호 9단을 2위로 밀어낸 그가 4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열린 43기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 이창호 9단에게 불계승을 거둔 것.

이 대국은 여러 면에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승부였다. 세계최강과 여류최강이 만난 ‘반상의 성(性) 대결’ 이자 승률 1위와 2위의 격돌이었기 때문이다.

루이 9단은 “이 9단과 수준차가 있다고 생각해 마음을 비운 게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이 9단의 패배도 패배이지만 그가 147수만의 단명국(短命局)으로 돌을 던지는 것은 ‘사건’에 가깝다. 한국기원 정동식사무총장도 “고수(高手)의 대결에서 ‘이변’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며 “루이의 기력(棋力)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평가했다. 이로써 루이 9단은 2승1패로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등과 함께 역대 전적에서 이 9단을 앞서는 몇 안되는 기사가 됐다.

‘루이 돌풍’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그는 17일부터 국내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전 결승 3번기에서 이 9단의 스승인 조훈현 국수와 대결하게 된다. 루이 9단의 기풍은 가냘픈 체구와 달리 전형적인 ‘싸움 바둑’. 같은 전투형이면서도 유창혁 9단이 화려한 스타일을 중시하는 반면 루이 9단은 투박하면서도 힘이 좋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번 결승전은 발이 빠르고 임기응변이 능한 조국수가 버티고 있어 볼 만한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평.

루이의 성적에 따라 국내는 물론 세계바둑사의 한 페이지가 다시 쓰이게 된다. 세계바둑계에서 여류기사가 남성들과 함께 겨루는 일반기전에서 타이틀을 따낸 전례가 없다.

“한국에서는 국수(國手)란 칭호가 옛날부터 나라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승전에 오른 것만도 기대이상의 성과인 만큼 조국수에게 많이 배우도록 노력하겠다.”(루이 9단)

세계적인 부부 프로기사이자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인 루이 9단과 남편 장주주(江鑄久) 9단은 지난해 3월부터 한국기원 부근의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바둑인생의 개화를 꿈꾸고 있다. 90년 당시 연인인 장 9단이 텐안먼(天安門)사태에 연루돼 망명길에 오른 뒤 이들은 92년 잉창치(應昌期)배 때 일본 도쿄에서 만나 냉수 한 사발을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루이 9단은 “그동안 미국 일본 등을 떠돌아 다니면서 바둑과 생활 모두가 불안했는데 한국에 정착한 만큼 올해에는 ‘아기도 만들고’ 좋은 기보를 많이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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