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비전21세기]정체성의 위기

  • 입력 2000년 1월 6일 19시 54분


미국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콜로라도주 플로렌스의 연방 교도소 뜰에서는 매일 이상한 모임이 열린다. 각각 다른 감방에 수용되어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만나서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오클라호마 폭발 사건의 범인인 티모시 맥베이, 유나버머인 시어도어 카친스키, 세계 무역센터 폭발사건의 주모자인 램지 아흐메드 유세프가 바로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다. 최근에는 감옥 안에서 세 건의 살인사건을 조종한 뉴욕 라틴 갱의 리더인 로이스 펠리페를 위한 자리도 이 모임 안에 마련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서구 문명을 혐오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반란은 21세기가 막 시작된 지금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고 있다. 맥베이는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탄생한 자유주의적인 제도와 민주적 절차에 반대하면서, 대신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맥베이 자신의 생각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고 했다. 카친스키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에서 생겨난 자기 정체성을 꿈꾸면서 ‘현대적인 인간’의 삶을 뒤엎으려고 했다. 유세프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서구의 현대 사상이 시온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믿고 있다. 펠리페는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속적인 사회 대신 자신의 민족적 법칙들과 충성심이 세계를 지배해야 할 이유들을 열거한다.

이들에게 있어 현대 세계는 자신들의 자기 정체성 주장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을 예외적인 존재로 선포하는 자기 정체성의 주장 역시 현대의 산물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와 자유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자기 정체성을 수용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이 더 높은 법칙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자기 정체성과 현대성 사이의 이러한 대립이 20세기에 일어난 중요한 갈등의 틀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나치즘은 이성의 법칙에 의해 통일된 보편적인 인류에 반대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피를 요구했다.

자기 정체성을 둘러싼 20세기의 갈등은 21세기에도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자기정체성의 광기보다 기술의 승리에 힘입은 계몽주의의 광기를 더욱 걱정한다. 기술의 지나친 발전은 20세기의 과학소설과 영화에서 묘사된 디스토피아의 소재가 되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위대한 신세계’ 같은 소설이나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같은 영화들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힘없는 꼭두각시로 상상하며 기업 자본주의, 정부, 법, 대중매체, 사회적 제도 등이 우리의 자기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압제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흔히 기존의 인습을 무시하는 무법자들이다. 혁명에 관한 이런 환상은 진정한 개혁을 낳을 수도 있지만 현실에 대한 과장된 인식을 낳을 수도 있다.

콜로라도주의 교도소에서 이상한 모임을 갖는 네 사람은 자기들이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혁명에 대한 환상은 자기정체성을 타락한 사회의 창조물로 보고 자기정체성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자신을 창조할 자유를 꿈꾼다. 사실 공산주의자들도 이러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기술이 이 환상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의 롤플레잉 게임은 자기정체성의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고 시험관 수정과 유전자 조작은 부모와 자식의 개념을 흐릿하게 만든다.

기술이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을 더욱 강화해주는 것은 민족국가의 쇠퇴이다. 상업과 통신의 국경이 없어지면서 국가간의 문화적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유토피아를 믿는 사람들은 인종 민족 국가 성별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도 사라질 것이며 대신 자유주의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인 연합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유토피아적인 꿈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선 우리는 자기정체성의 요구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자신과 다른 것과의 구분,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국가 종교 등의 모습이 변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우리는 또한 현대성으로부터도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현대성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들조차 정의와 이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에 투쟁과 갈등의 양상이 변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는 20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너절한 현실보다 극단적인 신념을 선호할 것이다. .

지금도 디스토피아적인 비전이 너무 우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완전하게나마 정의로운 사회가 우리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http://www.nytimes.com/specials/010100mil-identity-self.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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