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이끈 潮流]역사학/영웅에서 민중의 역사로

  • 입력 1999년 12월 21일 20시 10분


《E H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가란 높은 절벽 위의 독수리나 사열대에 앉은 귀빈처럼 행진하는 대열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단지 행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는 희미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학이란 역사의 일부일 뿐으로서 역사학의 변화는 역사적 사실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의미다.

카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예컨대 엄정한 문명비판에 근거해 세계의 문화권을 총괄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조차 1차대전 이후 ‘황무지’로 변해버린 서구 문명에 구원의 가능성을 던져주기 위한 저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역사학의 사조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작업은 역사학의 위상을 바꾸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사건 중에서 역사학의 본질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파급효과를 지녔던 것으로는 현실사회주의의 성립과 몰락, 2차대전이 초래한 대규모의 인종학살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성립과 몰락은 ‘사회사’라는 분야의 대두와 퇴조라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사회사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통치방식에 의해 역사가 결정된다고 믿는 인습적인 ‘정치사’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였으며 여기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은 마르크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역사가들과 아날학파에 속하는 역사가들이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소장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내세우면서 연구서와 논문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조르주 뤼데는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고 알베르 소불은 상퀼로트(sansculotte·프랑스 혁명 당시의 하층민 출신 혁명가들)의 성격을 새롭게 정의했으며 영국에서는 E P 톰슨이 노동계급을 달리 해석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시도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노동자 농민 하인 여성 소수인종집단 등 이른바 소외계층으로 연구의범위를확대시켰다. ‘사회주의’의 대립어가 ‘자본주의’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가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마르크시즘을 바탕에 둔 역사서술이 엘리트위주의 인습적인 정치사에 반발해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가 주인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결말일 것이다.

아날학파는 마르크스주의라는 학문 외적인 요인보다는 폴 비달, 들라 블라슈나 에밀 뒤르켕과 같은 프랑스의 선구적인 지리학자와 사회학자에게서 받은 영향을 역사학에 편입시켰다. 1929년 마르크 블로크와 뤼시엥 페브르에 의해 창간된 ‘경제사와 사회사 연보’ 즉 ‘아날(Annales)’을 축으로 활동하며 그것에서 이름까지 얻었던 이 학파는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유기체로서 사회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장기지속’이라는 변화하지 않는 구조에 관심을 두었고 그러한 관심은 지역적 차원에서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변화가 거의 없었던 농민들의 삶을 연구대상으로 부각시켰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로 궁정에서 벌어지는 정치보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즉 정치사보다는 사회사가 역사가들의 관심 연구영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되돌아본다면 이들이 출발시킨 ‘밑으로부터의 역사’는 어떤 한계에 봉착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사의 서술대상인 ‘대중’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는 ‘계급’을 위한 도구로 바뀌었으며 아날학파에 의해서는 통계를 위한 수치로 바뀐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40년대와 50년대를 들끓게 했던 토니와 로퍼 사이의 젠트리(gentry·영국의 鄕紳)논쟁이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 사이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봉건제의 주종관계를 계급의 틀로 이해한 브레너가 촉발한 1970년대의 논쟁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논의의 대상으로 남은 것은 그 계급에 속한 개개의 사람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농민이나 ‘부르주아’로서의 젠트리였던 것이다.

1960년대 미셸 푸코와 같은 선구자로부터 출발하여 이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신(新)문화사’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미시적, 즉 보다 개인적인차원에서 더욱 섬세하게 다루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신 문화사’의 등장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전이었으므로 그것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펼쳐질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신문화사’는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징조였으며, 그 몰락과 함께 더욱 힘을 발하고 있다는 반론을 펼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시사(微視史)’를 대표하는 역사가인 카를로 긴즈부르그와 카를로 포니가 주장하듯 사회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거시사적 개념이나 사회과학적 역사 접근방식에 근거하는 낙관적 견해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새로운 종류의 미시적인 문화사에 의존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신 문화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이고도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은 사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름없이 살다 사라져간 농부나 노동자들이 남긴, 혹은 그들에 대한 자료는 희귀하다.

따라서 신 문화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역사가들은 인류학이나 민속학과 같은 전통적인 인접학문은 물론 문학비평이나 심리학 등등 교류를 꺼려왔던 학문분야에서도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도움을 얻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 한편 양적으로 부족한 사료를 질적으로 보충하기 위한 방식을 개발했다. 상징분석을 통해 제한적인 자료를 ‘두껍게’ 읽어내려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 개별 무명인사에 대해 남겨진 기록을 통해 당대의 세계관을 추론해내는 미시사의 방법론이 가다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성과의 대표사례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관한 최근의 논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히틀러나 그의 추종자들에게 죄과를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제 미시사에 의존하고 있는 일상생활사의 접근방식을 통해 평범한 독일인들이 나치의 독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는가가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신 문화사에 대한 반발의 논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 논지는 다양하지만 가장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신 문화사적 연구방법이 ‘역사적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미립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아무리 미세한 세계로 파고 들어가도 결코 그 실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연구가 무의미한 것인가? 오히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사물의 본질에 근접해가고 있다.

역사 연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끊임없는 문제 제기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의 더욱 다양한 단면을 접하며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회는 ‘미술’로 필자는 서울대 김영나(金英那·미술사)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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