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83)

  • 입력 1999년 11월 28일 18시 51분


우리는 작업장에서 뛰쳐나와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피켓의 각목이나 공장 안의 파이프를 들고 식당 쪽으로 몰려갔는데 그쪽은 이미 불이 꺼져서 캄캄했습니다. 정문의 바리케이트가 휑하니 뚫려 있었구요. 식당에서 뛰어 나가는 놈들의 검은 그림자들이 보이더군요. 아마 칠팔십 여명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식당에 있는 것이 농성자의 전부라고알았던 모양이에요. 이쪽의 반격이 거세고 숫자도 많으니까 그들은 정문을 나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퇴각했어요. 우리가 식당에 들어가 불을 켰더니 십여 명이 다쳤어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도망을 쳤지만 잡힌 사람들은 아마 몰매를 맞은 거예요. 응급치료를 하고나서 병원 앰뷸런스를 불러 입원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이튿날에는 간밤에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과 출근한 사람들이 모두 정문 앞에 모여서 폭력 규탄대회를 열었죠. 어용노조 쪽에서도 마이크를 동원해서 계속 떠들며 우리의 집회를 방해했구요. 불순분자가 선동하는 파업에 동조하지 말라는 소리였어요. 우리 민노추 쪽에는 보통 날보다 사람이 더 모여서 천오백 명이 넘었지요. 민노추의 집행부는 아니었지만 쟁의를 처음부터 시작했던 기헌이가 나가서 외쳤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두었어요.

구사대의 폭력으로 우리를 짓밟고 수백명의 목을 자르고 차가운 감방에 처넣는다고 해서 우리의 단결과 투쟁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울 수 있듯이 우리 천만 노동자의 가슴 속에서 민주노조의 횃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며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노동자 형제 여러분, 우리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끝날 수 없습니다. 민주노조를 쟁취하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갑시다.

너희들은 그 뒤에도 이틀 동안을 더 버티었지. 네 동료들은 마지막까지 미루어 두고 있떤 회사의 본관 건물에 진입해서 컴퓨터와 정갈한 사무기기며 소파며 하는 따위들을 아래층에 내던지고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 버렸다. 그건 일방적으로 당해온 젊은 공원들이 대표부의 만류를 듣지않고 저지른 일이었다지. 너무도 열악한 작업장에 비해서 냉방기며 정수기며 음료 자판기까지 비치된 사무실 안을 처음 보고 눈이 뒤집혔던 탓이었겠지. 협상 때 회사측에 따라온 근로감독관은 지부에서 결정되지 않은 기존 노조 집행부의 불신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민주노조추진위에 통보했어. 제일 먼저 동조층이 허물어졌다지. 일주일 동안 농성하는 사이에 세 차례의 협상이 있었고 드디어 절반의 타결이 이루어지자 힘에 부치기도 했던 추진위는 그만 깃발을 내렸고.

그리고 나서 경찰과 기관원 십여 명이 관리직들과 합께 작업장에 돌입해서 파업 주동자들과 학출이었던 너를 연행해 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해고되었고 너는 위장취업의 행적이 없었던 탓에 구속은 안되고 한 달만에 풀려 나왔다. 너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지.

언니, 나는 기헌이와 신자 언니 그리고 우리 등산반 동료들과 함께 초라하지만 예쁜 행렬이 되어 아침마다 해고 철회를 위한 출근 투쟁을 하러 나가요. 그동안 좁쌀만큼 저축해 놓았던 돈도 다 떨어졌지만 퇴근 길에 집에 들른 동료들이 벼라별 것을 다 놓고 갑니다. 라면은 박스로 있구요, 연탄도 그득히 쌓아 두었어요. 나는 아무래두 여기 귀신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제가 등을 돌려 껍질을 깨고 나온 그 두텁고 어리석은 미몽의 알 속으로 되돌아 가겠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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