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순원/더 강한 자극을 받고싶다

  • 입력 1999년 11월 12일 19시 46분


언젠가 마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마약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약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담배처럼 한두번의 호기심으로 그것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이내 그것에 중독되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바로 중독 이후인데 자극이 자극을 부르고 그 자극이 또 다른 자극을 부르듯, 이제까지의 자극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어 자극의 도를 높이기 위해 투여 단위를 높이게 되고 그 시간 역시 점점 짧게 끊어간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노라면 마치 우리 국민 모두가 마약보다 더 심하고 어지러운 자극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집단적으로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는 요즘 집권세력의 언론장악에 대한 문서 공방이 한창이다. 하루하루 드러나는 일들과 주고받는 말들이 우리를 더없이 자극한다. 경제적으로는 한 재벌기업의 워크아웃이 진행 중이다. 이것 또한 처리 결과에 따라 우리 경제가 다시 그늘 속으로 들어가느냐 그것을 벗어나 양지 바깥으로 나오느냐가 달렸다고 해도 좋을 만큼 국가적으로 큰 일이다.

사회적으로는 씨랜드 참사 사고가 있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엔 인천에서 똑같은 사고로 수십명의 젊고도 아까운 생명을 그 불길에 잃었다. 어김없이 어느 사건에든 공직자가 그 사건 한가운데에서 빠진 적이 없다. 아니, 공직자 없이는 그런 참사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화 쪽 역시 그렇다. 한 탤런트의 성행위를 담은 비디오가 유출되어 사회 구석구석을 스며들더니 이번에는 어느 탤런트의 성 고백서가 또다른 ‘자극’의 날개를 달고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이미 놀라지 않지만 이제 웬만한 정치 공방으로는 국민을 다시 놀라게 할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제에서도 한번 터졌다 하면 수조원 단위의 부실이고, 또 한번씩 챙겼다고 하면 수천억원 단위의 탈세여서 100만∼200만원짜리 월급쟁이의 눈에조차도 그보다 작은 부실과 그보다 작은 탈세들은 아이들의 껌값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워낙 황당하고 큰 사건들이 많이 터졌던 터라 이제 한두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들은 사건도 아니게 되었다. 다음에 나올 영화나 책들도 이제까지 나온 것들보다 더 자극의 강도를 높이지 않는 한 우리의 눈길을 끌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이미 강도 높은 자극들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웬만한 자극은 자극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만약 이런 일들이 이땅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더이상 그런 것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에도 나오지 않게 되면 그때는 이미 그런 자극들에 중독될 만큼 중독된 우리가 오히려 심심해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제발 지금의 그 서툰 공방 같은 것들은 집어치우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공직의 한 자리를 맡은 사람이든 우리를 보다 강한 자극 속으로 몰아넣을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해 달라.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자극받았고, 더 강도 높은 자극 또한 충분히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더 강하고 더 짜릿하게 해다오. 그게 바로 2000년을 눈앞에 둔 우리 문화의 총체적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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