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홍규덕/'판도라 상자' 열린 印尼

  • 입력 1999년 10월 21일 19시 10분


인도네시아에서 54년만에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간접선거이긴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특수한 정치문화와 골카르당의 장기집권 체제를 고려할 때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인도네시아의 정권교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희망이 가득한 새로운 출발인 동시에 정치불안과 혼란의 서곡이 될 수 있다.

◇大選4결과 대이변

수하르토 실각 후 세계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진행된 이번 선거에서 국민각성당의 압둘라만 와히드가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변이 아닐 수 없다.

작년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시력을 거의 잃은 와히드는 어느 모로 보나 미래지향적 지도자는 아니다. 95년 이후 줄곧 메가와티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다 수하르토 임기말에는 수하르토 진영에 가담했다. 수하르토 실각후에는 다시 메가와티와 손을 잡는 등 기회주의적 성향을 보여온 관록의 정치인이다. 결국 지난 7월 메가와티가 총선에서 승리한 후 장관직을 제시한 데 불만을 갖고 메가와티와 결별하고 대통령에 출마했다.

정치인으로서의 탁월한 카리스마도 없고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구할 만한 건강마저 없는 그가 대통령선거에 나서자 많은 사람들은 다른 데 뜻이 있다고 판단했다. 집권 골카르당으로부터 이슬람표를 잠식하고 마지막 순간 메가와티에게 표를 몰아주는 대신 연합정권에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확보한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집권 골카르당의 하비비 후보가 사퇴하자 국민협의회 대의원들은 개성이 뚜렷하고 개혁성향이 강한 여성후보 메가와티보다는 병약하지만 온건하고 보수적인 와히드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인구의 87%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에서 3500만 교인들을 당원으로 확보한 국민각성당 당수가 지지를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공연히 대규모 행정개혁을 주장하고 부패청산과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외치던 여성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기 힘든 것이 기성정치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

와히드의 당선이 인도네시아 현실로 볼 때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온건 보수진영의 고뇌가 담긴 차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최선을 선택하기보다는 최악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담긴 선택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갈등이 고조되는 정치적 혼란기에 대다수 대의원들은 뚜렷한 적이 없는 와히드가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조용히 수행해 주기를 희망했다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정치발전이 조용하게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 미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큰 나라이며 다양한 인종과 이질적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세계는 냉전종식 이후 다인종 사회들이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경제적 혼란을 겪을 때 어떤 불행에 휩싸이게 되는지를 익히 보았다.

◇국제사회 관심 필요

인도네시아는 2차 대전이후 반세기 동안 혁명과 의회 민주주의, 대통령의 개발독재, 군부정치, 대규모 인종청소와 살상, 분리독립운동, 내전 등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역동적인 정치변혁을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수하르토가 실각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터널 끝에 빛이 보일 때 대중은 인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점차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소위 ‘터널효과’의 가설이다. 대통령선거 결과가 국민에게 긴 터널 끝의 서광처럼 희망의 불빛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21세기 인도네시아인들이 반세기 동안 경험한 시련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와히드를 중심으로 보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방법으로 국가통합과 민주주의를 이룩할 것인가?

인도네시아의 안정과 평화는 세계의 이해와 직결된다. 인도네시아가 정치적 리더십을 회복해 안정 속에서 번영의 터전을 가꾸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경제지원이 필수적이다. 국내정치의 안정도 무엇보다 시급하다. 새로운 정부는 군부의 지지와 협력을 얻고 정치 불간섭의 다짐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민주주의의 안착은 물론 새로운 대통령과 인도네시아 국민의 몫이나 오늘날과 같은 상호의존이 심화된 지구촌에서 국제사회의 지원과 관심은 정치안정화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홍규덕〈숙명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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