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는 기술에 밝은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탁월한 마케팅 능력으로 더 유명하다.
모리타 스스로 “소니의 전설이 된 ‘워크맨’은 시장조사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상업성이 없는 제품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싶어한다는 욕구에 주목, 워크맨을 만들어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8㎜홈비디오까지 소니의 히트 상품에는 모리타의 창의적인 마케팅 능력이 번득인다.
그는 또 도전정신으로 가득찬 벤처기업가였다. 그는 패전 이후 도쿄의 한 골목에서 한국돈 6만원 가량으로 이부카와 의기투합, ‘도쿄공업통신’을 설립해 93년 은퇴할 때까지 소니를 자산가치가 370억달러가 넘는 다국적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일찍이 국제화에 눈을 떠 일본사회의 약점을 통렬히 지적하면서도 서구인들에게는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는 60년대에 이미 ‘학력무용론’을 내세워 사원모집 때 대학을 구별하지 않고 오직 실력과 창의력만 보고 사원을 뽑았다. 또 그는 일본의 폐쇄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의 해외기업에 현지인을 과감히 채용하는 등 현지화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모리타는 “미국의 경영인들은 종업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꼬집고 89년 보수논객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와 공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발표하는 한편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여 일본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이병기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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