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Art]천년을 기록한 예술가의 눈

  • 입력 1999년 9월 26일 18시 58분


역사가로서의 화가는 별로 인상이 좋지 않다. 역사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흔히 고역으로 인식되었고, 이같은 화가들의 인식이 그림에 여실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로서의 화가는 상당히 다르다. 화가는 자신이 사건의 현장에 있었든 없었든간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직접 그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이 기사와 함께 실린 그림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틀을 잡아주고, 모두 잊을 수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런 그림도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범죄의 연대기 속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명료하고 간결하며 엄격하다. 마치 보도사진 같다. 아니 경찰이 찍은 범죄 현장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프랑스 혁명의 중요 인물이었던 마라는 1792년에 부엌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평소에 마라를 존경하고 있던 다비드는 현장을 직접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살해 현장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마라의 방은 다비드가 묘사한 것처럼 경건하지 않았다.

1625년에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은 훌륭한 예의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전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침략군에 맞서 오랫동안 브레다시를 지키며 농성을 하다가 항복했다.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35년경에 스페인 왕의 의뢰를 받아 그린 ‘브레다의 항복’은 현장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닌데도 이같은 현장의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의 네덜란드인들은 매우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결코 모욕 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프랑스 해군의 소형 구축함인 메두사호는 1816년 7월2일에 세네갈을 향해 항해하다가 좌초했다. 대부분 프랑스 군인들인 150명의 남자들은 커다란 뗏목에 옮겨 타고 13일 동안 바다를 떠돌았다. 이들이 아거스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그 동안 생존자들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 서로를 마구 죽였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먼저 죽은 사람의 몸을 먹기도 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이 사건이 훌륭한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존자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인근 병원에서 가져온 시체와 친구들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때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사람들 중에는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림이 바로 ‘메두사의 뗏목’이었다.

19세기에 유럽에서 그려진 강렬한 그림을 이야기할 때 들라크루아의 ‘군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것은 1830년 7월에 파리에서 일어났던 3일혁명이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에서 자유에 대한 외침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실제로 이 그림은 대중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전시되지 못하고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들라크루아의 손으로 되돌아가 1945년까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안전한 곳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독일 점령군이 프랑스에서 물러간 후에 이 그림은 루브르박물관의 재개관을 알리는 포스터로 이용되었다. 또 나중에는 프랑스 지폐에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1798년에 건조된 영국 군함 테머레어호는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커다란 활약을 함으로써 영국 해군의 자랑이 되었다. 그러나 ‘호전적인 테머레어’라는 별명까지 얻은 이 유명한 배도 세월이 흐르면서 증기엔진에 자리를 뺏기고 1838년 40년에 걸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에 이 배를 선박 해체소로 끌고 간 것은 증기엔진이 달린 작은 예인선이었다.

영국 화가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테머레어호의 이 수치스러운 마지막 여행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호전적인 테머레어’라는 제목의 우울한 그림으로 되살려 냈다. 터너의 그림은 당시 영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던 변화의 물결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867년 6월에 유럽인들은 멕시코 황제인 막시밀리안이 처형당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1864년에 멕시코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통해 상당한 지원을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나폴레옹이 약속을 뒤집어버리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은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베니토 후아레스의 군대에 포위되어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10일 후에 파리에 알려지자 나폴레옹 3세는 검열관들을 동원해 진실을 감췄다. 그러나 파리의 유명한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는 정부의 금기 같은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진실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대형 그림을 세 점이나 그렸지만 너무나 생생하게 현장을 묘사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작품 중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은 좀 특이하게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템페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탈리아식 화풍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유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린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체적으로 어색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나온 성 요셉의 모습이나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말을 하려 하는 목동의 모습 등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은 1000년의 시간을 뛰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커다란 뉴스를 속삭이듯 전해주고 있다.

▽필자〓조셉 러셀(뉴욕타임스의 미술 비평가 역임. ‘마티스:아버지와 아들’의 저자)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4/russell.html)

▼조지 콘도의 콜라쥬 '돈과 예술'▼

미국 화가인 조지 콘도가 제작한 이 콜라주(미술 기법 중 하나) 작품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역사적 비교가 포함되어 있다. 우선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작의 부유한 시간들’(1413∼16)의 삽화 캐릭터 옆에 상냥하게 서 있는 디즈니사의 마이클 아이즈너의 모습을 보면 디즈니랜드의 탑들이 공작의 성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한편 상냥한 표정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 복장을 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모습은 1994년에 게이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레스터코덱스’(1506∼10)를 사들였던 일을 상기시킨다. 또 르네상스 시대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축적과 무역의 확대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는 점도 동시에 의미한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빚을 져가며 예술가들에게 그림과 조각 등을 의뢰했다. 결국 문화는 돈의 힘에 매달려 있었던 셈이다. 동서간의 문화교류가 가능했던 것도 향료 무역 덕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물질주의는 그 시대에 꽃을 피운 화려한 예술작품들과 견고한 인본주의 사상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현대 사회가 후세에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될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4/condo.html)

▼캐더린 샤머즈의 콜라쥬 '안녕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12일 바하마 제도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거대한 생태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신세계로 이주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가축과 곡식을 함께 가져왔고, 쥐와 곤충들도 사람과 함께 옮겨왔다. 아메리카 대륙은 수천년 동안 고립상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이곳의 토착 생물들은 여러 번의 침략을 겪으며 강해진 구세계 생물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피사로와 코르테스의 군대보다 앞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공격한 것은 천연두균이었다. 한편 식물중에서는 클로버 엉겅퀴 복숭아나무 민들레 등이 신대륙의 밭과 숲을 점령했다. 그리고 신대륙에서 자라고 있던 바닐라 옥수수 담배 감자 해바라기 땅콩 토마토 초콜릿 등이 구대륙에 선을 보였다. 덕분에 유럽인들의 식단과 생활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캐서린 샤머즈의 작품들은 유럽 침략군의 돌격대인 바퀴벌레가 토마토로 상징되는 신대륙의 전리품에 매달려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사진 속의 이 곤충은 새로운 고향에서 너무나 번성한 나머지 지금은 미국 바퀴벌레로 불린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4/chalme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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