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29)

  • 입력 1999년 9월 26일 18시 58분


바깥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송영태가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서있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송이 도어를 열고 복도에 나가서 외쳤다.

선배님 여깁니다!

벌써 와 있었구나.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허름한 회색 양복에 노타이 차림인 삼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면도를 하지못해서 듬성듬성한 수염이 코 밑과 턱 아래 보였지만 얼굴은 단정해 보였다.

한 형 인사해. 우리 선밴데 해직 기자셔.

삼십대는 어른인 체하는 기색으로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김정수라구 합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잡힌채로 그냥 입속으로 아 네에, 하고 말았다. 송이 그에게 물었다.

가져오셨죠?

응, 간신히 찾아냈어. 자료는 여러 가지야. 당시 현장에서 취재했던 것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최근까지 목격자들과 투쟁 당사자들의 경험담을 모아 놓은 것들을 구했어.

어디 보십시다.

송이 다급하게 그에게서 한묶음의 자료와 원고 뭉치들을 받아서 내게도 일부분을 떼어주며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나도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김씨는 우리가 원고를 살피는 동안 혼자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좀 썰렁한데 이거. 여긴 밤에 스팀 안들어오나?

아, 그렇군요. 갖다 놨는데….

송영태가 책상 아래에서 형광등 전구처럼 생긴 전열기가 두 개 달린 난로를 꺼내어 전원에 꽂았다. 김정수씨가 말했다.

여러 사람의 합작인 셈인데 우선 날자별로 내가 표시를 해놨어.

음 여기 빨간 볼펜으루 써놓은 게 그건가요?

그럴 거야.

송영태가 내게 제안을 했다.

한 형 우리 작업을 좀 쉽게 하자. 우선 번호 순대로 추리고 그것부터 정리하자구. 김 선배는 에피소드 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들을 순서대로 표시해 주세요. 팜플렛에 다 반영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항쟁의 날짜 순서대로 사실을 전달하면 될거야. 지금 따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책으로 묶어내게 될테니까.

우리는 열 두시가 다 되어서야 대충의 줄거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태에게서 원고를 넘겨 받아 전동 타자로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읽었는데도 학살의 진상은 내 손끝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일곱 시가 다 되어 갑자기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선두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십이 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 열한 대가 잇달았고, 그 뒤로는 이백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버스 속에는 각목을 든 청년들 아가씨들도 타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어마어마한 분노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의 눈빛, 그들의 연대감, 그들의 헌신적인 결의야말로 오월 항쟁의 정점이었으며 이 해일은 이십 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온 시가지를 휩쓸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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