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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9월 7일 19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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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을 확정짓는 파 퍼팅을 마친 김미현(22·한별텔레콤)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10승 이상을 거둔 베테랑처럼….
한 조에서 우승을 다퉜던 제니스 무디의 축하포옹을 받는 그의 모습은 매우 절제돼 있었다. 역전패한 무디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크게 울고 있었으리라. ‘슈퍼땅콩’ 김미현의 미국LPGA투어 정상등극은 결코 손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눈물젖은 햄버거’를 씹으며 따낸 값진 열매였다.
박세리가 빠진 국내에서 매년 상금왕을 차지하며 안정된 프로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였다.
★밴타고 美대륙 누벼
그러나 ‘꿈이 큰’ 김미현은 이대로 머물지 않았다. 그가 고달픈 미국원정에 나선 것은 미국LPGA 프로테스트 통과 후 약 한달 뒤인 지난해 11월말.
박세리와 달리 든든한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현지에는 의지할만한 피붙이도 한명 없었다.참가한 대회에서 조금씩 상금은 받았지만 턱없이 적어 다른 선수들처럼 비행기를 타고 대회장소를 옮겨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안됐다.
★싸구려모텔 봇짐원정
아버지 김정길씨(52)가 중고 밴의 운전대를 잡고 어머니 왕선행씨(47)는 지도책을 펴들고 김미현은 뒷좌석에서 새우잠을 자며 세 식구는 ‘떠돌이’처럼 미국전역을 돌아다녔다.
LPGA선수는 대회 공식호텔에 하루 80∼100달러면 투숙할 수 있지만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싸구려 모텔을 전전했고 아침과 저녁은 갖고 다니는 전기밥솥으로 모텔종업원들의 눈치를 보며 방에서 해결했으며 점심은 골프장에서 햄버거로 때웠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탓에 세번째 출전 대회인 밸리오브스타스를 시작으로 3개대회 연속 예선탈락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게다가 위장병까지 도졌다.
박세리처럼 전담캐디 없이 현지에서 임시캐디를 고용해 플레이를 해야하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당장 보따리를 싸 귀국하고 싶은 마음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중 4월 칙필A대회에서 첫 ‘톱10’(공동9위)에 진입했고 자신감을 얻은 그에게 7월 한국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박세리보며 오기키워
한별텔레콤과 2년간 50만달러를 받는 파격적인 스폰서계약을 한 것. 천부적인 자질과 강인한 승부근성, 든든한 스폰서 등 ‘3박자’가 비로소 갖춰진 것이다.
이후 김미현은 올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듀모리에클래식에서 공동6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마침내 올시즌 여덟번째 ‘톱10’을 데뷔 첫 우승으로 장식한 것.
김미현이 골프에 입문한 것은 부산 충무초등학교 6학년 때. 당시 키는 1m50으로 큰 편이었다. 하지만 이후 단 3㎝밖에는 더 크질 않았다. 공식자료에는 1m57로 나와 있지만 그의 실제 키는 1m53.
★가사 도우려 대학중퇴
김미현은 이같은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호텔방에서도 아령을 놓지 않는다.
김미현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내 프로동기생 박세리의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고 ‘나도 기필코 저 자리에 서리라’는 다짐을 셀 수 없이 했다.
그가 용인대를 중퇴하고 96년 프로에 뛰어든 것은 어려운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골프에의 뜨거운 열정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큰물에 노는 큰고기’가 되기 위해 그는 미국행을 결행했고 마침내 ‘골프여왕’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안영식기자〉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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